[헤럴드POP]○첫 번째 마디 ? 김치찌개와 꿈

필자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회사원이다. 또한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이기도 하다.

대학시절 작곡을 전공했던 필자는 보잘것없지만 오래 전부터 꿈꿔온 것이 있다. 그 것은 바로.. 음악을 세상에 단 한 번만이라도 알려보는 것이다.

[이미지1 대학시절]
[이미지1 대학시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산 촌놈'이었던 필자는 군 제대 직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부모님의 썩어 들어가는 속을 헤아리지 못한 채 수 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철없이 부산을 떠났다.

그렇게 서울에 와서는 아무런 대책 없이 녹음실을 찾아 다녔다. 그나마 가까이서 음악을 접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청소와 허드렛일을 할 테니 작곡을 가르쳐달라’고 하며 곳곳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촌스럽고 초라한 필자의 모습은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았기 때문이다. 찜질방에서 쪽 잠을 자며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지고 왔었던 돈은 금방 바닥이 났다. 큰 소리치며 서울로 올라왔었기에 부모님께 전화하기가 꺼려졌다.

결국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했고 서초동의 한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도 밤에는 녹음실을 계속 찾아 다녔다. 그렇게 50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드디어 어깨너머로라도 배울 수 있는 녹음실을 찾을 수 있었다.

무보수로 녹음실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악기도 닦으며 냄새 나는 화장실 청소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는 희망에 마냥 좋았다. 녹음실 형들은 각자 하는 일에 바빴다. 그래도 디테일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배워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좋은 형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녹음실에서 삼시세끼 매일 밥까지 얻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적게나마 수입이 필요했다. 또 다시 일 할 곳을 찾아 헤맸다. 결국 가락시장에서 야채를 납품 받아 판매하는 총각네 야채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월, 수, 금은 녹음실을 나가고 화, 목, 토는 야채장사를 하며 2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미지2 야채장사]
[이미지2 야채장사]

서당개 3년에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부족했지만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2년 동안 보고 배운 실력으로 데모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곡 되지 않았던 데모 곡을 들고 용감하게 기획사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그들에게 필자는 단지 촌스러운 잡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지3 데모 곡 작업]
[이미지3 데모 곡 작업]

문전박대는 기본이며 들어본다고 말만 한 채 내 보내기 급급했다. 한 회사에서는 계약을 하자며 호의적으로 나왔지만 결국 돈을 요구하는 곳이었다. 하마터면 시작하기도 전에 빚쟁이가 될 뻔 했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웬만한 회사는 다 돌아다녔지만 어느 한 군데에서라도 연락이 온 곳은 없었다.

물론 많이 부족한 곡이었지만 프로의 세계는 아주 냉정했다. 문득 아버지에게 자주 듣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환청이 들려왔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 만큼 나중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는데 뭐가 되려고 이렇게 철이 없노 이 자슥아!! 아버지 친구 아들들은 의사다 뭐다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내고 있는 마당에..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속만 썩노.. 학교를 안 보내주드나 밥을 안 주더나”

30대를 향해 야속하게 세월은 가고.. 해 놓은 것은 없고.. 정말 수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이러다가는 평생 불효자가 되겠다 싶어 큰 결심을 했다.

“그래!! 되지도 않는 음악!! 실력도 없으면서 계속 붙잡고 있지 말고 깔끔하게 미련을 버려보자!!” “회사에 취직해서 고정적으로 돈을 벌자!!”

하지만 말이 좋아 회사에 취직이지 가지고 있던 스펙으로는 어느 회사 문 손잡이도 못 잡을 판이었다. 긁적긁적 이력서를 작성하고 구직사이트를 뒤져가며 취직 할 곳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허전한 스펙을 받아줄 착한(?) 회사는 없었다. 데모 곡을 가지고 다니며 기획사를 전전 긍긍했던 지난 날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희망이라는 것은 나랑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허탈감에 사로잡혀 의욕을 잃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게 시간을 보냈다.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급기야 부산에 다시 내려가려고 서서히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드라마처럼.. 다시 부산을 가려고 했던 그날 이력서를 넣었던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진짜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다음날 주섬주섬 양복을 챙겨 입고 면접을 보러 갔다. 사실 부족한 스펙 때문에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없었고 기대감 마저 적었다.

하지만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면접에 임했다.

그런데 어찌 면접의 내용이 예상 했던 것 과는 좀 달랐다. 학벌이나 스펙 보다는 현재까지 살아왔던 과정에 귀 귀울였고 힘든 시련이 있어도 잘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강인한 정신력과 맷집 위주로 면접을 보는 것이었다.

촌스럽고 어리숙하기만 필자의 어떤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운 좋게도 3차 면접까지 통과하여 최종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추측 해보면 겉모습이나 보여지는 스펙 보다는 장점을 파악해 최대한 끌어낼 수 있게 하고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았다. 가장 우선순위로 중요시 하는 것이 바로 ‘사람(人)’이지 않았나 생각 된다.

그렇게 인연이 된 회사가 바로 현재 필자가 6년째 근무하고 있는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다.

하지만 과연.. 회사에 입사만 한다고 해서 끝이었을까?..

처음에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회사에 출근하는 것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이기도 하고 그 동안 보고 자라며 생활 했던 환경들과는 전혀 달랐다.

이해력도 부족했고 업무 능률이 쉽게 향상되지 않았다. 같이 입사했던 동기들 보다 항상 한 발짝씩 늦었다. 팀 내에서도 집중 관리 대상자였으며 눈치도 많이 보였다.

하지만 항상 놓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

필자의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일을 잘 하지 못한다면 성실하기라도 하자’였다. 근태와 근무태도를 철저하게 준수했다. 그리고 매사에 정말 적극적으로 임했다.

[이미지4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 입사]
[이미지4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 입사]

그렇게 점점 업무가 자연스러워질 무렵이었다. 업무를 하면서 불편한 점이나 개선 사항 등을 회사에 이야기하고 조금씩 아이디어도 제시했다. 작은 목소리지만 여러 가지 의견들도 내며 서서히 녹아 들어 갔다.

[이미지5 회사생활]
[이미지5 회사생활]

회사는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의 목소리도 하나하나 다 받아줬다. 또한 의견을 반영하여 개선하며 바꾸고 늘 변화했다.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해 내려는 그런 회사가 좋았다.

또 어느 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더라도 다른 부서에서 장점을 끌어올릴 수 있게 기회를 주었고 정말 고맙게도 여러 부서를 다니며 회사와 업무에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이미지6 회사생활]
[이미지6 회사생활]

그렇게 울고 웃었던 6년이 흘러.. 지금은 홍보제휴팀의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도 쭉~ 인생의 그림들을 그려나가겠지만 입사 전부터 지금까지를 되돌아보면 한번씩 멍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거짓말 같기도 하다. 혹시 길고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꼬집은 볼이 아픈걸 보니 꿈은 아닌가 보다.

주책없이 옛날 일을 회상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보잘것없는 필자의 인생사(?)는 이 정도로 마무리 하고..

메르스 여파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러웠던 지난 6월로 잠깐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려 한다.

경기침체까지 겹쳐왔고 필자가 다니고 있는 회사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 또한 이를 피해 갈리 만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직원들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 속에 회사 내부적으로도 그렇게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김태욱 대표는 많은 고민과 함께 큰 결심을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미지7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 김태욱 대표]
[이미지7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 김태욱 대표]

“우리는 지난 15년간 꿈을 꿨다고 생각합시다. 미래를 위한 좋은 용꿈 말입니다. 지난 15년은 완전히 버리고 ‘이제 창업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새롭게 시작해 봅시다. 그 전에 가장 먼저 나 자신부터 바뀔 것입니다. 그 동안 나 조차도 부족한 점이 많았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필자는 사실 좀 놀랐다. 기업의 대표가 ‘부족하다’, ‘반성한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과연 쉽게 할 수 있을까.. 이뿐만이 아니다.

김태욱 대표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주말 할 것 없이 매일마다 직원들과 소통을 했다. 점심, 저녁 자리를 만들어 그간 오해와 갈등도 풀고 분위기를 다시 살리고 회사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밤잠을 설쳐가며 노력했던 아니, 노력하셨던 6월이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것이 아닌데 초반에 살짝 진지해 진 것 같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진지해 질 수 밖에 없는 시기였던 것 같다.

각설하고, 6월 29일 월요일 저녁때쯤 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 퇴근 하려고 회사 정문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차 한대가 올라왔다. 헤드라이트 빛에 부신 눈을 손으로 가리며 지나가려던 순간 앞 유리 넘어 대표님의 모습이 보였다.

이종현(필자): “안녕하세요 대표님, 퇴근하십니까?” 김태욱 대표: “어.. 그래~ 퇴근하냐?” 이종현: “네 대표님” 김태욱 대표: “혹시 오늘 저녁에 약속 있냐?” 이종현: “아.. 없습니다 대표님” 김태욱 대표: “그래? 그럼 저녁이나 먹고 퇴근해라 타라..” 이종현: “네~ 대표님 알겠습니다”

그렇게 차에 탔다. 그리고 근처 김치찌개 집에 대표님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자리에 앉아 마자 대표님은 식당 아주머니에게 “늘 먹는거 2인분 하고요, 소주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셨다.

사실 조금은 근사한 곳으로 갈 줄 알았는데 허름한 찌개 집에서 “늘 먹는거 하고 소주 하나요..”라는 대표님의 말이 좀 낯설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늘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강한 모습과 식당에서의 대표님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즘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고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힘없이 지쳐 보이기도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의 Sad(슬픔)가 뭘까? 도대체 무엇이 대표님을 쓸쓸하게 만든 걸까?..”

심지어는 “요즘 혹시 사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 하며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별 대화 없이 한 동안 보글보글 찌게 끓는 소리만 들리다가 문득 대표님께서 입을 떼셨다.

“한잔 받아라”

소주를 받아 들고 식탁에 내리기 무섭게 이어 한마디 더 하셨다.

“니는 꿈이 뭔데?”

갑자기 꿈 이야기를 하셔서 순간 당황했다. 필자는 말을 약간 더듬으며 대답했다. “이.. 이루지 못했던 오랜 꿈이 있는데요.. 제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제 꿈입니다”

[칼럼니스트 이종현]
[칼럼니스트 이종현]

대표님은 필자의 꿈을 들으시고는 짧게 대답을 이어나가셨다. “그래? 음악.. 알았다. 한잔 하자”

무엇인가 더 말씀하시려다가 참으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센치(sentimental)하신 걸까..

그렇게 별 대화 없이 소주 몇 잔을 더 기울이며 조촐한 저녁식사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가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도대체 오늘 왜 밥을 먹자고 하신 걸까..” 대화도 많이 하지 않았고 소주 몇 잔에 꿈 이야기가 전부였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아련했다.

평소와 다른 쓸쓸한 모습의 대표님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뭐지? 무엇 때문에 저리 슬퍼 보이신 걸까..”

혹시?..

[아이패밀리SC(아이웨딩) 홍보제휴팀 이종현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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