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억지 감동 대신 ‘솔직함’…달라진 리얼리티 문법

나영석PD “무조건 울어야 할 것 없다…진짜 리액션에 집중해”

‘대등왜’부터 ‘유재석 캠프’·‘기안장2’까지…진정성 통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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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뮤즈=김민지 기자] “결국 AI 시대의 역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동과 고생에서 오는 사람의 진정성이 오히려 ‘볼 이유’가 된 거죠.”

돌고 돌아 순정이 답일까. 짜인 각본과 억지 감동까지 꿰뚫어 보는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의 큰 미덕 중 하나는 ‘솔직함’이 됐다.

미션·억지 감동 대신 ‘솔직함’…달라진 리얼리티 문법

기안84(왼쪽부터), 이소민 PD, 김지현 PD, 김연경, 이준호/윤병찬 기자
기안84(왼쪽부터), 이소민 PD, 김지현 PD, 김연경, 이준호/윤병찬 기자

‘유재석 캠프’부터 ‘대체 등산을 왜 하는 건데’, ‘대환장 기안장2’까지. 올해 넷플릭스가 선보인 리얼리티 예능의 키워드는 진정성과 고생이다. 시청자는 편안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지만, 화면 속 출연진은 팔자에도 없던 산을 오르고 민박집을 운영하며 ‘고생길’을 걷는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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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고생’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달라진 건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촘촘하게 짜인 미션과 과한 연출 대신 출연진을 실제 상황에 놓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응을 지켜본다. 몸을 쓰고 ‘열일’하는 과정은 출연진의 꾸밈없는 모습을 끌어내는 장치가 된 셈이다.

이때 과한 리액션과 교훈은 금물이다. 고생 끝에 반드시 감동과 성장을 끌어내지도 않는다. 억지 감동과 감성에 반색하는 시청자들을 겨냥하듯 요즘 리얼 버라이어티는 한층 건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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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이 지점에서 과거와 달라진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의 특징을 짚었다.

김 평론가는 “과거 예능에서는 이른바 ‘자막 공예’라고 할 정도로 많은 자막과 사운드로 시청자를 압도하고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데서 오는 피로감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예전 예능은 미션형이 많아 상벌을 주거나 가학성을 띠는 경우도 많았다”며 “요즘에는 그런 재미보다 출연진이 ‘어떤 움직임을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정성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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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대체 등산을 왜 하는 건데’(이하 ‘대등왜’)에서 등산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출연진들은 마지막 산행에 이르러서도 끝내 ‘대체 등산을 왜 하는지’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다. 여전히 등산의 이유에는 의문을 품지만, 압도적인 설경만큼은 놓치지 않는다. 억지 깨달음 대신 출연진의 솔직한 반응과 압도적인 ‘볼거리’를 남겼다.

나영석 PD 역시 지난 8월 ‘대등왜’ 제작발표회에서 ‘요즘 스타일’의 예능을 선보이고자 했다는 취지의 설명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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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 PD는 “기존에 알던 예능인들과는 다르다. 카더가든이 리더인데 리더십이 전혀 없는 것처럼 모두가 요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환경에 더 집중하고 몰입해 보니 이들만의 날것의 리액션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어 “예를 들어 예전에는 일출을 보면 무조건 울어야 하는데, 여기 친구들은 ‘힘든데 꼴 보기 싫다’고 하더라”며 “저는 그게 진짜 리액션이고 요즘 코드라고 생각해 그런 부분이 즐거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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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솔직함은 등산 애호가부터 등산과 거리가 먼 시청자에게까지 통했다. ‘대등왜’는 공개 이후 높은 화제성과 함께 오늘의 대한민국 TOP 10 시리즈 1위를 기록했다.

‘유재석 캠프’·‘기안장2’, ‘열일’ 속 진정성 통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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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등왜’가 출연진 자신의 극복과 도전을 위해 택한 ‘고생’이라면, ‘유재석 캠프’와 ‘대환장 기안장2’에서는 타인을 위해 몸을 쓰는 ‘열일’이 펼쳐진다. 숙박객은 쉬지만 주인장은 쉴 틈이 없다.

김헌식 평론가는 두 프로그램이야말로 “오늘날 예능에서 시청자가 원하는 진정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짚었다.

그는 “더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라며 “출연진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고, 궁금해하고, 달성해 보고 싶어 하는 자발적인 마음에서 행동이 나올 때 인기를 끄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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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 캠프’와 ‘대환장 기안장’ 모두 유재석과 기안84가 직접 ‘하고 싶어 선택한’ 민박 포맷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김 평론가는 “평소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행동의 동기가 나올 때 진정성이 드러난다”며 “특히 기안84의 ‘기안장’은 예능과 현실의 구분이 없는 솔직함이 큰 인기 요인”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역시 세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출연진의 ‘진정성’을 중요하게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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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관계자는 헤럴드뮤즈에 “제작진은 출연진 본연의 매력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환경을 기획 단계부터 세심하게 설계했다”며 “출연진 역시 각 프로그램의 콘셉트에 깊이 공감해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어 “‘유재석 캠프’와 ‘대환장 기안장’은 리얼리티 예능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현장에서 제작진의 개입을 최소화했다”며 “출연진은 물론 일반 숙박객까지 불편함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관찰 카메라도 최대한 가려 촬영했다”고 설명했다.

방송에 능숙한 출연진들로 꾸려진 라인업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의 말은 오히려 현저히 줄어든다. 민박집 주인으로 100% 이입한 결과다. 설거지부터 음식 준비, 프로그램 기획까지 직접 해내야 한다. 제작진도 이들에게만큼은 좀처럼 ‘편한 길’을 내주지 않는다.

시청자는 이번에도 그 ‘열일’에서 드러나는 진정성에 반응했다. ‘유재석 캠프’와 ‘대환장 기안장2’는 모두 오늘의 대한민국 TOP 10 시리즈 1위를 기록했으며, ‘유재석 캠프’는 글로벌 TOP 10 TV쇼(비영어) 부문 5위에 오르며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열일’하는 출연진…리얼리티 예능의 새 공식

사진=넷플릭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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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와 집 공개로 ‘리얼리티’를 내세우던 시대에서 한발 더 나아간 요즘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리얼리티 예능의 트렌드가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 같다”며 “예전에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힐링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리얼리티 예능이 많았다면, 이제는 ‘나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만족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손 하나 까딱하면 AI(인공지능)가 많은 일을 대신 해주는 시대다. 가짜도 진짜처럼 보이는 요즘, 사람의 ‘진심’을 움직이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사람의 몸이 움직인다. 산을 오르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손님을 맞는다. 그 과정에서 흘리는 땀과 미처 연출되지 못한 표정까지 카메라에 담긴다.

편리함의 시대에 굳이 몸을 쓰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 정직한 ‘열일’이야말로 요즘 예능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