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성선해 기자] "어느 시대나 가려운 걸 긁어주고, 나아갈 바를 생각할 수 있는 문화가 존재했다." '터널' 김성훈 감독의 말이다. 대중예술의 순기능 중 하나인 풍자. 2016년에는 유독 그 몸집이 커졌다. 뼈 있는 메시지를 담은 텐트폴 무비가 연이어 흥행했기 때문. 시대를 읽은 병신년(丙申年)생 재난 블록버스터들을 모았다. ◆ '부산행' 할리우드 특산물인 줄 알았던 좀비는 2016년 국내 극장가를 강타했다. 지난 7월 20일 개봉한 '부산행'(감독 연상호/제작 영화사 레드피터)은 비주류로 취급되던 좀비를 1,000만 영화 주역으로 만들었다.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최악의 재난 상황에서 부산행 KTX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총 제작비 115억 원이 투입됐다.
'부산행'은 최악의 재난 속에서 이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정부의 무능함을 꼬집었다. 2년 전 세월호 참사를 잊지 못한 국민에게 '부산행'이 그리는 대한민국은 가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또한 합심과 협동이 필요한 극한 상황에서 "나만 아니면 돼"를 외치는 이들의 이기주의도 엿볼 수 있다.
이에 출연배우 공유는 영화 주무대인 KTX 열차 안 승객들의 모습을 '부산행' 관람 포인트로 꼽았다. 그는 "기차 안에선 다각도의 시선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수안(김수안)의 눈에 비치는 어른들의 다양한 면들이 되게 좋았다"고 했다.
독특한 소재와 참신한 연출, 그리고 묵직한 메시지. '부산행'은 이를 인정받아 지난 5월 제69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호평받았다. 개봉 전 작품성을 먼저 검증받은 것. 여기에 힘입어 정식 개봉 첫날 87만 명을 동원하며, 역대 오프닝 신기록을 경신했다. 결국 '부산행'은 누적 관객 수 1,156만 명을 기록하며, 2016년 첫 1,000만 영화가 됐다.
◆ '터널' '부산행' 바통을 이어받은 건 '터널'(감독 김성훈/제작 어나더썬데이, 하이스토리, 비에이 엔터테인먼트)이다. 지난 8월 10일 개봉한 이 영화는 무너진 터널 안에 고립된 한 남자 정수(하정우)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변해가는 터널 밖의 이야기를 그렸다. 총제작비는 100억원 대 초반이다.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와 '끝까지 간다'를 연출한 김성훈 감독의 차기작으로 기대를 모았다.
특히 '터널'은 재난물 공식을 깬 전개와 유머를 얹은 풍자로 호평을 이끌어냈다. 거대한 도시나 전 지구를 대상으로 쓰나미나 지진이 등장하는 여타 재난 블록버스터와는 달리, '터널'의 주요 배경은 매몰된 터널 안에 갇힌 정수의 차와 터널 밖의 세상으로 나뉜다. 또한 전조현상 없이 바로 재난을 맞이하는 전개 역시 신선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터널'은 고립된 정수의 처지와 그의 구조를 둘러싸고 변해가는 밖의 상황을 대비시켰다. 자신의 일이 아니란 이유로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한 시민들과, 전시행정에 급급한 고위 관료 등이 대표적이다. '터널' 역시 세월호 참사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평을 얻은 이유다. 이에 대해 김성훈 감독은 "어떤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은 아니다"면서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뭔가를 첨가하거나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고 했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터널'이 담은 메시지는 날카로웠지만, 전달 방식은 유머가 있었다. 정수 역의 하정우는 고립된 상황에서도 대안을 찾아내며 점차 적응해나가는 사람의 일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슬프지만 웃긴 현실이었다. 그의 곁에는 무려 사이드킥(sidekick)도 존재했다. 퍼그종의 강아지 탱이다. 정수와 탱이가 터널 속에서 벌이는 좌충우돌 사건은 참혹한 재난의 현장를 웃음으로 물들였다.
◆ '판도라' '부산행'과 '터널'에 이어 2016년 재난영화 종결자는 '판도라'(감독 박정우/제작 CAC엔터테인먼트)다. 지난 7일 개봉한 이 영화는 총제작비만 155억을 들인 블록버스터다. 역대 최대 규모 강진에 이어 한반도를 위협하는 원전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 작품이다.
'판도라'는 개봉 전부터 국내 대형 상업영화 중 최초로 원전 사고를 소재로 삼아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 지진까지 더해졌다. 때마침 투자가 불발되고 개봉일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외압 의혹을 받기도 했다. 소재 자체가 지난 9월 경주 일대에서 발생한 지진과 옆 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판도라' 제작기간이 유난히 길었기에 발생한 오해라고. 박정우 감독은 '판도라'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철저한 사전조사는 물론, 후반작업까지 4년간 공을 들였다. 외압설에 대해 박정우 감독은 "실질적으로 외압 때문에 개봉 시기를 못 잡은 건 아니다. 후반작업이 오래 걸렸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해명조차 곧 무색해졌다. 개봉 시기와 맞물려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판도라' 속 내용은 픽션(Fiction)이 아닌 팩션(faction)이 됐다. 영화 속에도 국정을 농단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때문. 이쯤 되면 영화가 아닌 예언서라고 할 수밖에. 이에 힘입어 '판도라'는 개봉 5일 만에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돌파하며 사랑받고 있다. 시국이 부른 흥행 질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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