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저에게 천억 원을 줘도 백석의 시 한 줄 하고도 안 바꿉니다."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이 있을까. 함께 한 날보다 그리움을 안고 살아간 날이 더 많은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시리도록 애틋하고 아프도록 아름답다.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 이야기가 무대에 올랐다. 트라이아웃 공연부터 관객의 좋은 반응을 얻었던 이 작품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하 나나흰)'로 정식으로 무대에 올랐고, 애틋하고 시린 사랑 이야기로 많은 관객의 공감을 얻으며 호평을 받았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롭게 각색된 이 작품은, 백석의 삶 중 아주 일부분을 담고 있다. 20대의 젊은 청년인 백석과 자야가 불같은 사랑을 나눴던 그 순간부터 만주에 떠나기 전까지의 기억 어딘가를 맴돌며, 자야(김영한 여사)가 죽기 전 백석을 만나 안타깝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과거로 여행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함축적이고 여러 번 곱씹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시(詩)다. 백석의 시가 그대로 넘버가 되는 '나나흰'을 위해 채한울 작곡가가 가장 신경 쓴 것은 선택과 집중. 시를 가사로, 즉 음악의 다른 말로 다듬는 작업에서 일상의 말과 비교해 정제되어 있는 시의 언어 중 어떤 말을 선택하고 버릴지 결정하는 겻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빈틈없이 압축되어 꽉 찬 감성은 배우의 연기와 퍼포먼스로 풀어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추억 속 애절한 사랑 이야기지만 과거와 현실의 시점을 미묘하게 오가며 속도감을 붙였다.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과 미소 지어지는 대사들로 마냥 슬프기만 한 분위기를 지양했다. 방관자였다가, 시를 읊기도 하고, 백석의 아버지였다가 친구이기도 하면서 1인 다(多)역을 소화한 사내는 실질적으로 극의 전환에 개입해 흐름을 이끌어가며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백석과 자야의 애달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함축해 드러낸 곳은 무대라는 공간이다. 무대 세트와 조명은 피아노 선율과 더불어 극의 분위기를 전달했다. 특히 무대 전체를 둘러싼 대나무의 든든하지만 쭉 뻗어 차가운 특유의 속성에 하얀 조명을 덧입혀 한층 더 시린 느낌을 표현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로 쓸쓸함에 공허해진 마음과 그리움에 사무친 감정을 담아낸 무대는 심플하지만 몰입도 높은 배경으로 완성됐다.

이에 대해 무대 디자이너 서숙진은 "대본을 보고난 뒤 받은 이미지는 '색 바랜 하얀색'의 정원이다. 이것은 기다림이나 사랑의 여정일 수도 있는 백석과 자야의 '인생 정원'을 무대 위에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조명 디자이너 이주원 또한 "대본을 읽자마자 하얀 이미지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 "자야의 하얀 이미지와 그보다 더욱 눈부신 붉은 그녀의 삶을 소중하게 표현하려 했다"고 덧붙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뮤지컬'이라 표현되는 '나나흰'은 장치나 효과에 집중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이자, 배우 한명 한명이 시가 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필요한 소품만 활용해 군더더기가 없고, 분장이 아닌 배우의 말투와 연기 그리고 최소한의 의상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다. 특히 자야의 의상 변화 중 '붉은 치마'는 색감이 주는 느낌까지 잘 활용하며 극의 슬픔과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켰다.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아도 되는 관객은 오롯이 배우와 음악에 집중하며 자연스레 집중력을 높였다.

길상사 산책에서 시작한 '나나흰'에 대해 박해림 작가는 "시 한 줄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그녀의 삶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그녀를 백석의 시 안에서 살게 해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연출 오세혁은 "한 걸음 걷더라도 만주까지 가 있고, 한번 앉았는데 십 년의 세월이 흘러가 있고, 한 줄 두 줄에 100개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시처럼 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밝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2016뮤지컬작품상, 극본/작사상, 연출상을 받으며 3관왕을 달성,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백석 시인 역에 강필석·오종혁·이상이, 자야 역에 정인지·최연우, 사내 역에 안재영·유승현이 출연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지난 2016년 11월 5일에 개막하여 2017년 1월 22일 그 아름다운 막을 내렸다.

(사진 제공=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