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시국은 불안정할지 언정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다. '벙커 트릴로지'에서도 전쟁극을 보는 관객일 뿐이다. 결코 상상할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을 감히 체험했다고 말하기는 송구스럽지만, 약 20평의 벙커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끔찍함과 상처, 그리고 아픔은 여타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현실감으로 다가오며 전쟁과 생명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현재를 살아감에 감사함을 느끼게 한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제스로 컴튼 프로덕션/연출 김태형, 작가 지이선)는 제1차 세계대전 참호를 배경으로 아서왕 전설-아가멤논-맥베스 등 총 3개의 고전을 재해석해 독립된 이야기로 진행되는 옴니버스 작품이다. 역사의 고증보다 그 당시 시대적 배경과 고전이 만나 신비로운 세계관을 구현했다. 영국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창작자이자 국내에서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사이레니아'로 한국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제스로 컴튼의 대표작이다.
◆ 아서왕 전설을 재해석‘모르가나(MORGANA)'
유명한 원탁의 기사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가진 젊은 영국 청년 아더, 랜슬롯, 가웨인은 분위기에 휩쓸려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전쟁에 참전한다.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폭격과 하나 둘 목숨을 잃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지쳐갈 때쯤 맞이한 성탄절 날, 가웨인은 무인지대에서 만난 여자 이야기를 꺼낸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남았던 세 사람의 감정은 엇갈리기 시작하고, 결국 혼자 남게 된 아더는 친구들의 본명을 울부짖으며 전쟁의 공포와 쓸쓸한 감정을 토해낸다.
세 에피소드 중 가장 몽환적인 '모르가나'는 벙커라는 공간 안에서 전쟁의 두려움을 가장 잘 구현해냈다.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천장과 부스스 떨어지는 모래 잔재들은 관객들에게 전쟁의 현실감을 선사한다. 특히 극한 공포 속에서도 서로 힘이 되어주던 친구였던 세 사람은 가웨인의 정체 모를 여인의 이야기로 금이가고, 결국 무언가에 홀린듯 목숨을 잃는 장면은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이 겪는 심적외상을 떠올리게 한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 가장 죽음과 가깝게 맞닿아 있던 그들의 상황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더욱 쉽게 흔들렸다. 완전 무장을 전제로 시작되는 전쟁은 없듯이 신속한 동작으로 군장을 갖췄던 청년들은 병정놀이의 모험이 아닌 실제 상황에서 처연하게 목숨을 잃었다. 가슴 아픈 상실을 담았지만, 극 중 가웨인과 마녀 모르가나로 추정되는 의문의 여자와의 대화는 배우들의 호연으로 잠시나마 극의 긴장을 풀어주며 숨통을 트이게 한다.
◆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희랍극 ‘아가멤논’을 모티브로 한 ‘아가멤논(AGAMEMNON)’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중인 최전방 전선이 배경이 되는 '아가멤논'은 영국인 부인 크리스틴을 둔 독일군 저격수 알베르트가 전쟁에 참전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충실한 독일군인 알베르트는 영국인인 크리스틴과 반해 적극적인 구애 끝에 결혼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알베르트는 자신을 붙잡는 아내를 뒤로 한 채 참전했고, 저격수인 그의 명성은 높아져만 간다. 전쟁의 광기가 커질수록 크리스틴의 기다림은 끝이 보이지 않고 독일과 영국의 갈등이 깊어지며 이들의 운명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전쟁으로 부강해지는 나라는 없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에피소드는, 전쟁에 참여한 군인 뿐만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 또한 피해자라는 것을 아프게 드러낸다. 저격수로서의 알베르트는 수완이 좋은 군인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하를 미끼로 사용하며 한 목숨을 그저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며 이미 생명에 대한 가치를 잊은 그는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들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크리스틴 또한 그의 머리 속에서 외면 당한지 오래다.
홀로 남겨진 크리스틴은 자신을 도와주는 알베르트의 먼 친척 요한에게 도움을 받으며 아기를 키운다. 독일군인 남편과 영국군이 된 자신 오빠들이 서로 총을 겨눈 상태임을 아는 그녀는 언제나 좌불안석이다. 그러던 중 아기를 잃게 된 크리스틴은 전쟁의 상실감과 피폐함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분노한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더 잃을 것이 없다. 크리스틴은 포상 휴가를 받아 나온 남편 알베르트과 어긋나며 결국 자신의 손으로 그를 편안히 보낸다. 마지막에 눈을 감은 알베르트를 보며 "이제야 내가 아는 얼굴이 되었다"며 울부짖는 그녀의 모습은 전쟁 앞에서는 모두가 피해자 임을 절실히 드러낸다.
세 에피소드 중 가장 눈물샘을 자극하는 '아가멤논'은 전쟁터가 아닌 집에 남겨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람을 조명했다. 목숨을 걸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최전방의 군인과 그들 중 누군가를 기다리며 목숨을 걸고 그 자리를 지켜내는 사람. 전쟁을 소재로 그린 영화나 공연 등의 작품들이 대부분 전쟁 상황에 집중했다면, '아가멤논'은 양쪽 이야기를 모두 전개시키며 파괴와 상처 뿐인 전쟁을 한층 더 깊고 아프게 표현했다. 마지막에 나오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은 벙커를 벗어나는 관객들에게 소름으로 배웅을 전한다.
◆ 셰익스피어의 고전 '맥베스'를 극중극 형태로 각색한 '맥베스(MACBETH)'
제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전쟁에 참여한 국가들은 붕괴 직전인 상황, 영국군의 후방 본부 참호 안에서는 종전을 자축하는 전야제라는 명목하에 장군과 병사들이 모여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공연한다. 전쟁의 피와 광기로 얼룩진 참호 안에서 거대한 포격 소리와 점점 숨통을 조이는 독가스의 공격, 환청과 죄의식 욕망은 맥베스를 통해 모두를 잠식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모든 것이 잠식당할 때 드러나는 본능과 본성에 주목한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고전을 알고 간다면 더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다. 극중극 형식이지만 조명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이야기는 절묘하게 벙커 안의 상황과 이어지며 주제가 담고있는 의미를 한층 더 파격적이고 분명하게 전달한다. 언제 포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 죽음과 가장 가까이 직면하고 있는 병사들에 대해 지휘 본부에서는 그저 승리를 위한 말 정도로 생각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전쟁을 단지 공적을 쌓을 기회로 여기는 윗 사람들. 그들과의 반대로 병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았던 마크 중위는 대대장으로 특진하며 승리만을 위한 살인병기로 변해간다.
누구보다 병사들을 아꼈고, 극한 상황에서 인간적인 모습까지 보였던 마크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의 부정적 요소를 모두 끌어 안고, 전쟁터에서 사무실로 일하는 장소를 옮기자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 대대장이 그랬듯 지도 위에 홍차를 놓고 마시면서 우아하게 전장을 지휘한다. 몇 사람이 죽던 그것은 승리를 위한 과정일 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한 보라도 전진했다면 성과가 있는 것이라 우겨대며 피해 상황에서 눈 돌린채 자기 만족에 빠져있는 그를 타락의 늪에 빠트린 것은 과연 권력의 힘 뿐일까.
'맥베스'는 세 에피소드 중 벙커라는 공간을 가장 잘 활용한 극이다. 관객들 목에는 입장할 때 나눠준 군번줄이 걸려져있고, 마크 대대장이 문을 통해 입장하면 모두가 기립해 경례를 한다. 이로써 관객은 그들과 같은 군인이자, 관찰자이면서 방관자 역할을 하게 된다. 대대장 마크가 죽을 위기에 놓여 "살려달라"고 사정할 때, 밴은 무심한 듯 "여기서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로 관객을 지칭하고, 무심결에 극 속으로 들어간 관객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복잡한 감정을 갖게된다.
'모르가나'와 '아가멤논'의 엔딩과 다르게 '맥베스'는 직접 관객에게 말을 걸어온다. 시간 상으로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인 '맥베스'는 가장 큰 여운을 남기며 벙커를 빠져나가는 관객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여러분 우리는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나 살아있고 싶지 않습니다. 죽은 자들의 희생만큼 저희가 가치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영웅이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 그저 우리 대신 그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병사들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천 만명의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진실을 기억하며 살고 싶습니다."
'벙커 트릴로지'의 배역 이름은 솔져1, 솔져2, 솔져3, 솔져4다. 전쟁에서 죽어간 수 많은 이름없는 병사들을 나타내기 위해 극중 불리는 이름을 대신해 솔져 1,2,3,4로 배역을 표기했다. 전쟁의 참상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의미와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의 책임을 묻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에는 솔져1 역에 이석훈·박훈, 솔져2 역에 오종혁·신성민, 솔져3 역에 임철수·이승원, 솔져4 역에 김지현·정연이 출연한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2월 19일까지 공연.
(사진 제공=아이엠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