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인터뷰②에서 이어짐)
지난 5월 5일 연극 ‘보도지침’ 오세혁 연출은 자신의 트위터에 고상호와 주고받은 메시지를 공개했다. 오 연출은 ‘그리고 오늘날에는. 대체 왜 죽어야 합니까. 대체 왜.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은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구절을 정배의 최후독백에 넣어달라 요청했고, 고상호는 "제가 딱 찾던 말입니다"라고 답했다.
오 연출은 “고배우가 어느 날 말했다. 최후독백에서 이 시대의 억울한 죽음들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를 찾고 싶다고. 난 계속 찾지 못했다. 그러다 개막 전날 갑자기 떠올랐다. 오늘 무대 뒤에서 고정배의 독백을 들으며 참 고마웠다. 고정배 때문에 찾은 한마디”라는 글로 고상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이에 대해 묻자 고상호는 “오세혁 연출이 미화해서 잘 써주신 것”이라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제주 출신다보니 처음에 가장 신경 쓰인 부분이 1948년 제주에서 7만 명이 희생당한 4·3사건이다. 거창와 광주 이야기도 거론됐는데, '오늘날'이라고 하는 부분이 시간적-공간적 배경 모두 다 열려있다. 그래서 시점의 모호함이 있다. ‘보도지침’ 마지막에도 ‘재판을, 아니 토론을, 아니 연극을 마칩니다’라고 하잖나. 관객에게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가 될 수도 있는 지점이라 모든 걸 열어두고 생각하게 됐다. 정배 대사 중 '가끔씩 배가 침몰하고 있지만'이라는 말도 세월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유람선이 침몰하는 사건 등이 있었지만, 지금 사람들의 뇌리에 꽂혀 있는 것이 세월호라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나는 그런 부분을 건드리고 싶었다. 과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억울한 죽음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다. 고상호가 정배를 빌어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오세혁 연출에게 전했다. 사실 연락을 기다렸는데 안 와서 잊으신 줄 알았다. 공연 전날 메시지를 받고 '너무 좋다' 생각하면서 무대에 섰다."
‘보도지침’ 프레스콜 현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서로의 대답에 웃고, 경청하며 따듯한 시선으로 지켜봐 줬다. 본 공연에서도 배우들의 훈훈한 유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기에, 연습실에서도 재미있는 일이 많지 않았냐고 묻자 오세혁 연출 생일 에피소드를 꺼냈다. 이미 기세중 씨가 다른 인터뷰에서 공개했다고 밝히자, 고상호는 금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아 먼저 했구나..”라고 말하며 뚱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 연출님 생일 때, 배우들이 연습을 제끼고 '몰래카메라'를 이유로 낮술을 먹으러 갔다. 그때 컴퍼니 매니저와 무대 감독님이 ‘연습 안 하고 어디 가냐’고 당황해 했는데, 윤상화·서현철 선생님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물론 연습 유무와 상관없이 오 연출은 ‘허~ 감사합니다(성대모사)’하며 좋아해 주셨다. 배우들을 돈독하게 만들어준 에피소드가 아닌가 생각한다. (기세중 배우가 ‘형들이 그냥 연습하기 싫으니까 나가서 술을 마신 것 같다'는 멘트를 남겼다고 전하자) 아 그렇구나, 저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웃음).”
고상호만이 가진 에피소드를 찾기 위해 무대에서 벌어진 재미난 일은 없었는지 묻자 다시 한번 뚱한 표정이 됐다. 그는 ‘샥스핀’ ‘멜빵 빠진 사건’ ‘박정표 공연 중 화장실 간 사건’ 등 ‘보도지침’ 무대에서 일어난 모든 해프닝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 에피소드가 다 박정표 형이 있을 때고, 항상 내가 없을 때 일어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공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무엇인지를 묻자 1위는 ‘트레이스유’ 2위는 ‘명동로망스’라고 나열했다.
“뮤지컬 ‘명동로망스’(2016)를 할 때, ‘서울사는 장선호’라고 소개를 해야 하는데 불쑥 ‘고선…호 '라고 말했다. 극 초반이었는데 등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고선호’라는 단어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무대 뒤에 들어가서 바로 사과했는데 형들은 그저 웃기만 했다. 사실 그 날 공연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나한테는 큰 사건이었다. 현재 내 안에서 에피소드 1순위인 것은 ‘트레이스 유’(2016) 때다. 마이크에 이를 부딪쳐서 새로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런데 계속 치과 치료가 늦어지면서 걱정이 많았다. 격정적인 대사와 노래를 하는데, 임시로 끼워놓은 이가 무대 위에서 툭 빠지면 어떡하나 생각했다. ‘이 치아가 빠지면 웃긴 토끼 이빨이 나오는데, 이걸 어떻게 애드리브로 칠까?’라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결국 그런 참사는 없었다. 그때는 잘 못 먹어서 살도 많이 빠졌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했다는 고상호는 중고생 시절에는 록(Rock) 밴드도 결성했고, 제주에서 열린 노래자랑 대회에 나가 대상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인정받은 노래 실력, 그리고 지금까지 무대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성량과 뛰어난 가창력. 그럼에도 '트레이스 유'는 힘들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트레이스 유’는 록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작품이 주는 힘듦이 있다. 에너지를 한 번에 쫙 몰아서 발산해야 하고, 감정 변화가 캐릭터에 완전히 빠져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무대는 연기를 하면 티가 나서 상대방을 믿고 따라가는 흐름이었는데, 순간순간 마주하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지르면서 에너지를 써야 하는 곡도 많았다. 그 후, 잔잔하게 노래하는 상황에서 감정의 편차가 굉장히 심하기 때문에 오는 에너지 소모가 컸다. 커튼콜 또한 에너지가 바닥난 상황에서 했다. 힘들었던 만큼 후련하고, 보람찬 공연이었다."
고상호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목소리다. 어디선가 정제되어 나오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밝고 또렷해서 대사가 듣는 이의 귀에 쏙쏙 들어온다. 언제부터 그렇게 좋은 목소리를 갖게 됐냐고 묻자 “개인적으로 이 목소리를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중·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언제 이렇게 목소리가 좋아졌냐?’고 물어본다. 나도 모르게 순차적으로 목소리가 변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걸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연기를 하면서 거칠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예를 들면, ('햄릿' 독백 성대모사 후)김대곤 형 같은 목소리다. 내 목소리는 이미지를 한정시키는 것 같다. 분명 아나운싱에는 좋은 소리인데, 연기를 하면 너무 리얼해져서 제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장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대 공연에서는 그나마 괜찮을 수 있지만, 매체에서는 앵커 혹은 기자 역 외에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바꿀 수 있을까 고민 중이다. 더 포괄적인 목소리를 갖고 싶다.”
개구쟁이에 장난기도 많고 밝은 분위기를 좋아하는 고상호는 최근 뮤지컬 '비스티'와 '미드나잇'에서 섬뜩한 역할을 맡았다. 그가 선보인 이승우와 비지터는 고상호가 가진 고유의 분위기에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그만의 섬세한 디테일이 더해져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고상호는 이런 이미지!'하고 떠오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지가 다양한 배우가 되고 싶다. 지금 내가 장난스러운 모습이지만, 어디서는 되게 무섭고 짜증 내고 화날 때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모습들이 극 안에서 다양하게 투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드나잇'의 비지터도 역할이 무거워 보이지만 그 안에서 장난스러운 것을 많이 한다. '비스티' 승우도 보여지는 시간이 짧아서 아쉽긴 했지만, 엄마랑 전화 통화할 때나 주노형과 이야기 할 때는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인간이고, 그것이 캐릭터의 살이있음을 드러낼 수 있는 것 같다. 캐릭터가 쭉 한 모습이면 지루할 것이다. 그래서 무거운 역일 수록 어떻게 하면 가볍게 풀 수 있을까 더 많이 고민했다. 이미 무겁다고 보이니까 오히려 상반되게 풀어야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터뷰④으로 이어짐)
(사진=본사DB,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