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표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무대 위 고상호는 무표정이 인상적인 배우였다. 분명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데 표현하려는 감정과 에너지가 전달된다. 무대 밖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풍부한 감성을 지녔다. 속으로는 고민하고 많은 생각을 하지만, 보이는 모습은 유쾌하고 활발하다. 배려와 조심스러움을 품었지만,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며 자기가 있는 장소와 역할을 현명하게 파악하고 분위기를 장악한다. 이 배우라면, 세상의 어떤 감정 표현도 가능할 것 같다.
최근 대학로 티오엠 2관 회의실에서는 뮤지컬 배우 고상호와 헤럴드POP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고상호는 지난 4월 21일 개막한 연극 ‘보도지침’에서 편집장 김정배 역을 맡아 열연 중이다.
연극 '보도지침'은 제5공화국 시절인 1986년 전두환 정권 당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 ‘말’ 지에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작품이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구성된 연극인 이 작품은 실제 보도지침 사건의 인물들이 법정과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말들을 대사로 표현, 극을 더욱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주목을 받았다.
고상호는 어느덧 10년 차 뮤지컬 배우가 됐다. 배우가 되기 위해 제주에서 상경,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리던 그에게 ‘보도지침’은 뜻깊은 첫 연극이다. 처음 연극에 도전한 소감을 물었더니 핸드폰을 꺼내 미리 준비해온 답변을 읽기 시작했다. “감사하고 있다. 매 공연마다 새롭게 깨닫고 배우고 있다.” 이에 너무 짧다고 말하자,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하나씩 해결하면서 와보니 벌써 마지막이 보인다. 매 공연이 긴장이었고 여전히 편하지는 않다. 모든 공연이 나에게는 그렇다. 편할 수 없는 것 같다. 특히 장면 자체가 법정이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위에 나와 있다는 점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그 와중에 정배라는 캐릭터는 편하게 보여야 하는 상황인데, 배우 고상호로서는 아직 힘든 것 같다.”
‘보도지침’은 한 캐릭터에 더블 혹은 트리플 캐스팅이다. 그만큼 같은 인물이라도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나타나는 개성도 다르고, 어떤 페어로 무대에 서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시너지도 다르다. 고상호는 매번 다른 조합으로 연기하며 깨닫는 것이 많다고 말한다.
“매번 함께 서는 배우들이 바뀌다 보니 같은 상황이라도 어느 때는 답답함 위주로 표현되고, 다른 때는 억울함이 중심이 되어 나타날 때가 있다. 그 흐름을 느끼면서 나도 가끔 놀란다. 연극 무대에 처음 오르면서 느끼게 된 가장 큰 것은 화술에 대한 차이점이다.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말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이 많은 듯한 고상호는 지난 4월 27일 열린 ‘보도지침’ 프레스콜에서 ‘대사를 저는 것’에 대한 민감한 질문을 받았다. 화기애애하게 진행되던 분위기 속에서 그는 홀로 시무룩한 표정으로 “연극은 뮤지컬과 정말 다르고, 어렵다고 느낀다. 마이크에 이렇게 길들여져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 후로 고상호의 정배에게 더욱 관심을 두고 관찰하게 된 것도 사실. 당시 질문을 받았던 심경과 지금도 연극 화법이 많이 신경 쓰이는지 물었다.
“프레스콜 때 표정이 시무룩했다는데, 그 방향성은 나를 향했던 것이다. 연극을 하면서 느끼던 점이기도 하고, 죄책감도 들었다. (무슨 죄책감인가?) 공연은 라이브니까 매회 새롭고, 지나가면 끝이니까 배우로서 처음 오시는 관객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실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보도지침’ 속 대사가 일상어 화법으로는 쓰지 않는 단어가 많아서 발음에 주의가 필요하다. 대사로부터 자유로워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내가 멘탈이 약한 것 같다(웃음).”
고상호에게 전에도 대사를 씹는 실수나, 발음에 대한 지적을 많이 받았는지 묻자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동안 뮤지컬 무대에서 본 고상호는 누구보다 정제된 목소리로 또렷하게 대사를 전달하는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처음 경험하는 연극 무대에서 더 많은 고민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는 담담하게 이런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극복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내 화법이 문제라고 생각된다면 문제인 것이다. 연기적인 부분을 떠나 이 부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번 공연을 통해 내 연기의 중점이 이런 방향이었구나 깨닫기도 했고, 느끼는 것도 있다. 뮤지컬 무대에서는 마이크가 소리를 잘 전달해주니까 감정적인 부분이나 디테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작게 읊조리거나 속삭여도 전달이 가능하다. 그런데 연극은 하나하나 정확하게 화술로 드러내야 한다. 그 발성으로 감정을 표현하는게 무척 다른 방식이었다.”
과거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보도지침’은 시대에 따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정치·사회적 이슈가 강하게 담긴 것 같지만, 결국 작품을 통해 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 안에 담겨있는 연극 정신과 시대를 극복해 낸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상호와 '보도지침'의 첫 만남이 궁금했다.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땐 충격이었고, 화도 나고 답답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 삼아 그 위에 이야기를 덧붙여서 만들어진 작품이잖나. 진실 여부를 떠나 사실을 열거했을 뿐인데, 이것이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정말 말하고 싶었다. 내 입으로 전하고 싶었다. '지금 사회에서 이 이야기를 해도 괜찮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거대한 메시지를 전하기에, 연극을 처음 하는 내가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보도지침’ 속 인물 김정배는 언제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다. 고상호는 김정배에 대해 “내 성격과 닮은 부분이 많은 친구”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든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하게 넘어가려고 하는 부분이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며 개구진 모습을 보이는 것. 그런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며 어떤 방법으로 풀어갈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했단다.
“남자 역에게 고문당하는 장면에서 김정배의 외적인 요소에 언급되는 대사가 있다. ‘너는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지.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성격을 가진 것이 분명해. 한 번도 고통을 느껴보지 않았던 얼굴. 너 같은 놈들은 전기 고문이 딱이지.’ 나는 정배가 가진 외적 모습이 왜 이렇게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할까 고민했다. 그리고 법정에서 그 유머가 어떤 식으로 변질됐을까, 고문 전-후로 정배에게 웃음이란 어떤 의미일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살던 정배의 포커스가 이쪽으로 향하는 순간, 그 웃음은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형적 성향은 대본에 적힌 사실이라 거스를 수 없었다. 오세혁 연출가가 생각하는 정배에 대해 들었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정배가 그렇게 된 이유를 찾아가려고 노력했다.”
(인터뷰②으로 이어짐)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