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그때와 지금, 우리는 달라졌습니까?" 지난 4월 21일 대학로 티오엠(TOM)2관에서 연극 '보도지침'(연출 오세혁)이 개막했다. '보도지침'은 1986년 제5공화국 시절 전두환 정권 당시, 김주언 한국일보 기자가 월간 '말'지에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작품이다.
사회부 기자였던 김주혁은 친구이자 편집장 김정배가 발행하는 월간 '독백'에 보도지침 584건을 폭로한다. 이후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변호사 황승욱을 대동한 채 법정에 앉게 된다. 이들을 기소한 검사는 최돈결. 네 사람은 대학 시절 함께 술잔을 나누고 연극에 대해 뜨겁게 이야기하던 친구였다.
연극의 시작은 여자의 말(言)로 시작된다. 그는 관객을 향해 "1분 뒤면 역사적인 현장이 펼쳐진다. 카메라를 아직 끄지 말라. 젊은 언론인 2명의 기자회견 장면을 마구마구 찍어달라. 역사의 현장을 담아달라"고 외친다. 순식간에 기자회견장으로 변한 공연장은 실제로 많은 관객이 핸드폰이나 준비해온 카메라로 김주혁과 김정배의 연설 장면을 찍으며 분위기가 고조된다. 적극적인 관객 참여는 아니지만 '보도지침'에서 관객은 여러 역할을 담당한다. 기자회견장에서는 기자가 되고, 법정에서는 방청객이 되며, 대학교에서는 학우로 변했다가, 마지막에는 극장에 온 관객으로 돌아간다. 이는 법정으로 설정된 간결한 무대 세트 속에서 작품이 의도하는 '죄를 가르는 법정이자, 말을 주고받는 광장이자, 마음을 주고받는 극장,' 즉 시간과 장소의 모호성을 관객이 극 안밖에서 직접 체험하게 만든다.
법정 장면은 세 면으로 둘러싸인 무대의 특성으로 더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가운데 중심을 잡고 있는 판사 송원달과 (관객석에서 바라봤을 때)왼편 원고 측 검사 최돈결, 오른편 피고 측 김주혁·김정배 그리고 변호사 황승욱까지. 특별한 장치나 화려한 조명이 없는 무대는 간결하고 엄숙한 법정의 공기를 무게감 있게 표현한다. 그 공기 위에 얹어지는 딱딱하고 건조한 검사의 진술, 그리고 이에 맞서는 변호사의 열변은 그 당시의 모습을 재연하며 힘있게 사실을 전달한다. 특히 '보도지침'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구성했기 때문에 연극 속 주인공의 대사에는 실제 보도지침 사건 인물이 법정과 기자회견장에서 했던 말이 포함되어 있어 사실적인 감각이 극대화된다.
'언론의 흑역사'가 된 사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과거의 말이 고스란히 옮겨진 부분도 있고, 지금도 변하지 않은 권력과 힘에 대해 날카롭게 드러내기도 했다. 꽤 무거운 연극이 될 법도 했지만 '보도지침'은 네 인물의 관계성을 드러내며 긴장감을 풀어준다. 철모르던 대학 시절 연극반에서 만나게 된 최돈결·김정배·김주혁·황승욱. 이들은 선배의 애정어린 괴롭힘도 함께 당하고, 술잔을 부딪치며 연극 정신을 깨닫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배우들의 애드리브나 돌발 멘트는 과거로 돌아간 대학 시절의 모습에서 대부분 탄생한다. 법정과 학교,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순식간에 분위기를 전환해야 하는 것이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호흡이겠지만, 관객에게는 법정의 팽팽한 분위기를 환기하며 웃을 수 있고, 더불어 네 사람의 관계를 파악하고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보도지침'은 억지로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과거를 통해 이런 반성해야 하고 현재 우리는 이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극 중 과거와 맞닿아 있는 현재 모습을 관객 스스로 떠올리게 하며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유도한다. 편집장인 김정배는 그저 사실을 담은 책인 월간 '독백'이 어떻게 세상을 흔들겠느냐고 말하면서 "대한민국은 하늘엔 조각구름 떠 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아름다운 나라다. 가끔 배가 침몰하긴 하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배가 침몰한다"는 대사에서 대부분의 관객은 세월호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배'가 정확히 세월호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세모 유람선 침몰 사건' 등이 있었고 '배'를 키워드로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은 그 외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2017년 현시점에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사건은 세월호다. 이 작품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통해 현재를 투영하며 안주하고 있던 우리의 모습과 여전히 개선되지 않은 사회적 시스템을 비춘다.
'보도지침'의 주요 인물은 더블 혹은 트리플 캐스팅이다.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같은 캐릭터라도 개성과 느낌이 달라져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7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봉태규는 현실감 넘치는 연기로 주혁을 완성했다. 특히 딸 돌잔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가 100분 이상 이끌어 온 기자 주혁에서 아빠의 모습을 내비치며 사람 냄새 나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김경수의 주혁은 온도가 높았다.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는 그 기운은 법정에서 정배의 손을 잡아주거나 어깨를 토닥여주고, 함께 일하는 이 대리에게 힘들지 않냐고 말을 건네는 따뜻함과 신문사 편집장에게 기사를 왜 내보낼 수 없는지 항의하거나, 법정에서 의견을 제시할 때의 말투 등에서 드러나는 뜨거움으로 나뉜다. 이형훈은 32세 주혁이라는 인물의 나이와 실제 나이가 가장 가까운 배우이면서 오세혁 연출이 말한 한층 차가워진 '보도지침'을 나타내는데 부합하는 연기를 펼쳤다.
김정배 역의 고상호, 박정원, 기세중 또한 각기 다른 매력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고상호의 정배는 까불거리는 면과 평화주의적 성격이 잘 드러났다. 거기에 배우 본연이 가진 날카로움이 더해져 말장난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무게를 실어줬다. 박정원은 자유로운 정배를 표현했다. 마지막 독백 장면에서 테이블에 올라 발언하는 등 가장 활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배우들 중 가장 어린 기세중은 존재만으로도 풋풋한 분위기에 장난스러운 말투로 분위기 극의 메이커 노릇을 톡톡히 했다. 최돈결 역의 남윤호는 수년간 연극에서 다져온 발성과 정확한 발음으로 '정의를 찾겠다' 말하며 자신의 길을 찾는 검사의 냉철한 모습을 잘 드러냈다. 안재영의 최돈결은 표면적으로는 차가운 이미지였지만 그 안에서도 감성이 묻어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황승욱 역의 박유덕은 다양한 표정과 폭발적 감정 표현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같은 역의 박정표는 '보도지침'의 에피소드 메이커로 활약하며 극 중 재미를 선사하는 동시에, 차진 사투리로 한층 더 개성있는 인물을 구현했다.
김주혁 역 봉태규·김경수·이형훈, 김정배 역 고상호·박정원·기세중, 황승욱 역 박정표·박유덕, 최돈결 역 남윤호·안재영, 송원달 역 서현철·윤상화, 남자 역 김대곤·최연동, 여자 역 정인지·이화정이 출연하는 연극 '보도지침'은 오는 11일까지 대학로 티오엠(TOM)2관에서 공연된다.
(사진 제공=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