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현실을 비춘 연극은 송곳처럼 뾰족하지만 의외로 아프지 않다. 이미 살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씁쓸하지만 익숙한 향기가 감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 감상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무대 위 모습이 누군가와 닮아있어 겹쳐 보인다면 더욱 그렇다. '글로리아'는 진한 감상적 여운과 함께 근본적인 성찰이 동반된다.

지난 7월 14일부터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된 연극 '글로리아'가 오는 13일 마지막 공연을 펼친다. '글로리아'는 2016 퓰리처상 드라마 부분에 노미네이트되며 다시 한번 작품성을 인정받은 수작이다. 영미 문화권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극작가 브랜든 제이콥스-젠킨스(Branden Jacobs-Jenkins)의 작품인 이 이야기는 잡지 편집부 안에서 함께 일을 하는 캐릭터들을 통해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작품 속 인물들은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졌다. 이를 통해 인종, 성별, 세대, 성적 취향, 학벌 등 인간의 정체성을 포괄하는 민감한 문제들을 솔직하고 신랄하면서도 위트 넘치게 전달한다.

줄거리에 대한 지식 없이 봐도 메시지가 극의 전체를 덮고 있는 '글로리아'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쉬운 것도 아니다. 깊게 생각하고 의미를 찾고자 하면 더 재미있고 심오해지는 매력 가득한 작품이다.

'글로리아'의 1막은 잡지 편집부에서 펼쳐진다. 직장인에게 낯설지 않은 회사의 풍경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담겨있어 익숙하고 불편한 느낌을 준다. 하나둘씩 모이는 편집부 팀원들의 모습은 일상처럼 자연스럽다. 편집부 어시스턴트 켄드라, 딘, 애니 그리고 인턴 마일즈가 함께 일하는 공간은 화기애애한 듯 날카롭다. 웃고 떠들지만 각자 어떻게 하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서로에게 불친절하다.

이날의 이슈는 존재감 없는 교열부 직원 글로리아의 파티에 참석한 딘의 이야기다. 애니는 "진짜로 갈 줄은 몰랐다"며 조롱하듯 웃고, 켄드라는 글로리아와 자신은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기에 영리하게 처신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턴인 마일즈는 귀가 따갑도록 이어지는 세 사람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숨 쉬는 존재감만 내뿜으며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서로 말을 섞고 있지만 진실과 배려가 없는 이들의 관계를 친밀하다고는 볼 수 없다. 회사라는 공간이 본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인 장소인 만큼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함께 하고,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눠도 쉽게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일보다 수다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는 그들에게 팩트체킹 팀장 로린이 몇 번이고 찾아온다. "시끄럽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그는 이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넋두리처럼 풀어놓는다.

일상처럼 흘러가던 1막의 피날레는 충격적이다. 너무나 극단적인 결말이지만 공감이 가는 건, 일을 하며, 인간관계를 맺으며, 선후배 사이를 겪으며,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에 망설이며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속에 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이고 싶다, 죽고 싶다'는 일차원적 의미가 아니다. 지긋지긋한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는 욕망을 표출하는 하나의 상징적 의미로써 총을 표현낸다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인물들의 말 속에 담긴 현실적 이야기는 그 공감도를 더욱 상승시킨다. 켄드라는 "어시스턴트 일도 재미있다"고 말하는 애니에게 "5년 계획을 세워라. 안 그러면 네가 대학 다니면서 한 번쯤 해보면 재밌겠다 하던 일이 직업이 되고, 결국 빼도 박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글로리아'에서는 회사라는 작은 사회, 사무실이라는 비좁은 공간에 축소해 나타냈지만 이 사회에 만연하게 정착된 학벌 중심부터 은연중에 드러나는 인종차별, 상하관계, 따돌림 등은 누군가에겐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나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극단적으로 그려냈다.

워낙 충격적으로 끝난 1막 덕분에 인터미션 또한 지루하지 않다. 2막에서는 스타벅스와 LA의 회사, 두 곳을 무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2막이 1막보다 극을 파헤치는 재미가 있는데, 이는 한 배우가 다(多) 역을 맡기 때문이다. 로린을 제외한 모든 배우는 2~3역을 소화한다. 글로리아는 낸, 켄드라는 제나, 딘은 데빈, 마일즈는 숀 겸 리샤드, 애니는 샤샤 겸 캘리를 맡아 또 한 번 열연한다.

2막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막에서 어느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2막에서는 어떤 역으로 변신했는가다. 의미없이 배우가 부족해 다른 역으로 분한 것이 아니다. 역할끼리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게 대비를 보여주든, 다른 이의 그림자처럼 비쳐지든 구성은 제각각이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외면적 변화나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와 닿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연출 김태형의 탁월한 구성 능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글로리아'는 절대 가볍지 않은 작품이기에 난해하게 메시지를 숨겨버리면 관객은 이해를 못 할 뿐만 아니라 극 자체에 흥미를 잃을 위험이 있다. 김 연출은 자신이 의도하고 내포한 것을 관객이 체감할 수 있도록 구성해 작품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 1막에서 회사라는 지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던 일들이 2막에서는 더 큰 환경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저마다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글로리아 사건은 워낙 충격적이었기에 많은 사람에게 트라우마와 상처를 남겼다. 흔히 사회를 '정글'에 비유하잖나. 룰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 남는 자가 강하다는 것이다. 2막에서는 그 논리가 잘 드러난다. 살아남은 자는 더 안정적인 삶을 꿈꾼다. 그런 미래를 위해서라면 아팠던 과거도 하나의 아이템으로 활용하며, 다가온 기회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더 우월한 자리에서 누리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씻어낼 수 없는 상처. 불행 속 다행으로 남은 그 혼란 속에서도 인간은 계산적으로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셈한다. 피해자처럼 굴고 지나간 상황을 안쓰럽게 여기지만 결국 진짜 가여운 사람은 잊혀져간 진짜 피해자들이다. 일단 가해자의 신분인 글로리아는 이름을 남겼지만, 눈을 감은 채 사라져간 피해자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비극을 에피소드 삼아 이야기를 생산하며 희생과 아픔을 이용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며 양심을 저버린 인간은 매우 치사하고 유약하다.

'글로리아' 무대 위에서는 소름끼치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놀랍지는 않다. 그 모습이 내가 또는 우리가 사는 사회라는 곳이고 인간이 모이는 장소라면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다가 문득 생각하게 된다. 저 무대 위 인물 중 나를 비추는 거울은 누구인가.

한편 '글로리아'에는 팩트체킹 팀장 로린 역 정원조, 장기근속 교열부 직원 글로리아 겸 낸 역 곽지숙, 하버드 출신 편집부 어시스턴트 켄드라 겸 제나 역 손지윤, 편집부 어시스턴트 딘 겸 데빈 역 이형훈, 편집부 인턴 하버드 졸업반 마일즈 겸 숀 겸 라샤드 역 오정택, 편집부 어시스트턴트 애니 겸 샤샤 겸 캘리 역 공예지가 출연한다. 13일까지 아트원씨어터 3관에서 공연.

(사진 제공=노네임씨어터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