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안태현 기자] 다시 한 번 ‘홍상수’지만, 그렇기에 ‘홍상수’였다.

쉬지 않는 다작이다. 지난해 ‘그 후’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관객들을 찾았던 홍상수 감독은 올해에도 ‘클레어의 카메라’ 이후 다시 한 번 ‘풀잎들’을 통해 관객들을 찾는다. 벌써 22번째 작품이니 이제 무슨 새로울 게 있나 싶다. 하지만 ‘풀잎들’은 이러한 예측을 아주 손 쉽게 전복시켜버린다. 늘 그렇듯 홍상수 감독은 또 다시 평범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허나 틈이 많던 서사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고, 그 속에서 인간사의 관계, 사랑, 삶, 죽음을 더욱 집중해서 관조한다. 색채 없는 흑백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물들의 색채는 더 뚜렷해져있다. 변화라면 변화고, 진보라면 진보다. ‘역시 홍상수 감독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영화는 커피집에 앉아 타인들의 얘기를 엿듣고 있는 아름(김민희 분)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다. 친구 승희의 죽음을 두고 그 탓을 홍수(안재홍 분)에게 돌리는 미나(공민정 분)의 발악과 기거할 방 하나 없는 노년의 배우 창수(기주봉 분)가 성화(서영화 분)에게 혹시 방 하나를 내어줄 수 있냐고 묻는 풍경, 자신에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며 지영(김새벽 분)에게 한 달 동안 같이 펜션에서 공동 집필을 하자고 이야기하는 경수(정진영 분)의 모습까지. 그녀 앞에서 벌어지는 촌극과도 같은 대화 속에서 누군가는 타인에게 의지하려하고, 타인에게 잘못을 돌리려 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선을 긋는다. 그저 아름은 이들을 관찰자의 입장에서 지켜만 본다.

그렇게 카페에서의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 대해 자신의 사색을 늘어놓던 아름. 영화는 그런 관찰자 아름이 영화의 화자인 듯 설정하지만 또 어느 시점에서는 아름을 관찰 대상으로 두기도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여전히 아름이 관찰하는 대상들이 존재하기는 한다. 최교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순영(이유영 분)에게 있다고 쏘아붙이는 재명(김명수 분)이 그 주인공이다. 그간 고정된 화자의 서사를 해체하여 어떠한 서사적 틈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던 홍상수 감독이 ‘풀잎들’에서는 화자를 변칙적으로 옮겨가며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은 꽤나 신선하게 다가온다. 더 이상 새로운 변화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던 홍상수 감독이 보여주는 또 한 번의 새로움이다.

신선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슈베르트의 ‘즉흥곡’과 바그너의 ‘로엔그린’, 오펜바흐의 ‘지옥의 오르페우스’ 등 이번에도 영화의 배경으로는 웅장한 클래식 음악이 깔린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 음악들이 꽤나 드라마틱하게 서사와 교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카페 주인장이 틀어놓았다고 설명되는 이 음악들은 인물들의 대화의 내용과 템포에 너무나 적절하게 매치된다. 그간 홍상수 감독 영화에서 느껴졌던 음악과 상황의 불균질성에서 발현되는 아이러니와는 다른 감정을 선사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유머는 빠지지 않는다. 늘 그래왔듯, 홍상수 감독은 ‘풀잎들’에서도 인간들의 솔직한 모습들을 그려내며 뼈저리게 아프고 씁쓸한 웃음들을 이끌어낸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말할 것이 없다. 서영화, 기주봉, 정진영, 김새벽, 공민정, 안재홍, 이유영, 안선영 등 그동안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얼굴을 보여 왔던 배우들은 다시 한 번 영화 곳곳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인다. 신인 신석호 역시도 이러한 기라성 같은 배우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각인시킨다. 특히 시종일관 뒷모습으로 등장하는 김명수의 경우, 대사와 아른거리는 그림자만으로도 명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홍상수 감독의 뮤즈 김민희 또한 이번 영화에서도 가장 중심된 인물로서 서사를 탄탄히 받치고 서 있다. 하지만 너무 연속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김민희를 보아온 덕분일까. 여전히 ‘김민희는 예쁘고 사랑이 최고야’라고 말하는 홍상수 감독의 이야기가 저절로 각인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라나는 풀잎들과 차갑게 부는 가을바람만으로도 경이로운 세상. 그 속에서 인간들은 살아가고, 사랑하며, 의지하고, 외면하면서 죽음으로 향한다. 시간은 변화하지만 인간(혹은 그 속성)과 관계들은 한 계단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하듯 정체된다. 하지만 반복되는 계단의 오르내림에서도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는 일어난다. 인간과 관계 또한 정체 속에서 어떠한 변화들을 가진다. 의미 있는 것조차 의미 없어지고, 의미 없는 것조차 의미 있어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또 삶이라는 반복. 홍상수 감독은 이 복잡하고도 어려운 이야기를 66분이라는 러닝타임에 완벽하고도 매력적이게 녹여낸다. 얄밉지만 어쩔 수 없는 ‘홍상수’다. 영화 '풀잎들' 오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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