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안태현 기자] 삶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 그 자체가 고통을 이겨낸 성장이다.
최근 독립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다소 고통이 밀려오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친다. 대개 이야기의 소재가 무겁고,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역시도 너무나 무거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버린 성장이라는 주제는 수많은 영화들이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반복되는 배경과 분위기에도 제각각의 영화들은 의미를 가지려고 애썼고, 하나의 차이점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로 이야기를 던지는 것의 의미, ‘화두’였다. 성장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하는가. 이를 곱씹어보게끔 하는 것에서 이미 주류의 독립영화들은 성취를 이뤄가고 있었다.
영화 ‘영주’ 역시 이러한 성취를 뒤이어가는 작품이다. 다소 구태의연한 성장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영주’는 그럼에도 소재의 변주를 통해 그 방향을 다른 목적지로 상정한다. 나아가지 못하는 성장의 정체가 아닌 그럼에도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소녀 ‘영주’(김향기 분)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그려내며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다. 시작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녀 영주와 그의 동생 ‘영인’(탕준상 분)의 모습에서부터 출발한다. 부모는 없지만 함께 있고 서로 챙겨주면서 이 가정의 소소한 행복만은 깨질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영주’만의 생각이었다.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영주에게 현실의 무게는 너무 무겁다. 결국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영주는 자신의 부모가 죽은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 ‘상문’(유재명 분)을 찾아간다. 차라리 떵떵 거리며 살고 있으면 가서 돈이라도 요구할 텐데 이 사람 또한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영주는 상문과 그의 아내 향숙(김호정 분)이 운영하는 두부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고, 점점 이들에게 마음을 열어간다.
향숙은 사고로 인해 코마 상태에 빠진 아들에 대한 상실감을 영주로 채우고, 영주는 부모를 잃은 상실감을 이들로 인해 채우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러한 삶을 살아간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와중에 동생 영인은 “어떻게 그 사람들 얼굴을 맨날 볼 수 있냐”고, “엄마아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며 영주의 감정을 더욱 힘겹게 억누른다.
영화는 이러한 관계들을 촘촘하게 엮어가며 그 속에 자연스럽게 감정을 녹여낸다.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다. 그저 관망하고 싶은 감정들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진다. 그리고 이는 영주를 연기하는 김향기를 통해 더 사실적으로 전달된다. 2003년, 만 2세의 나이로 TV CF를 통해 데뷔한 김향기는 그간 많은 작품들로 탄탄하게 쌓아온 연기력을 영화 ‘영주’를 통해 확실하게 펼쳐 내보인다. 그저 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느낌이 아닌 소녀 영주가 가진 현실의 무게를 같이 떠안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여기에 유재명, 김호정 등의 배우들이 호연이 어우러지니 더욱 영화는 현실감 가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극이 너무나 무겁게 흘러가다 보니 관객의 입장에서 다소 체력적인 소모가 강하다. 특히 후반부 촘촘하게 얽힌 감정들이 한데로 모아질 때의 힘이 너무나 강하다. ‘영주’가 가진 양날의 검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장이다. 소녀 영주가 고개를 들어 세상을 향해 딛는 발걸음처럼 영화에서 주는 오롯한 고통을 안고 관객 역시 삶을 마주해야 한다. ‘빛이 나는 구슬’이라는 뜻의 이름 영주(瑩珠). 하지만 ‘주(珠)’는 구슬이 아닌 진주라는 뜻도 포함되어있다. 빛이 나지 않아도 진주는 그 자체만으로 값지다. 삶을 향해 내딛는 힘든 발걸음 그 자체로 고통을 이겨낸 성장이고, 값진 것이다.
“‘영주’가 상처받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어른’이 되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 서글프지만 따뜻한 편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차성덕 감독. 상실로 가득 찬 세상,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거기서 좌절하지 않는 모습만으로도 ‘영주’는 빛이 나는 영화다. 수많은 영화들이 좌절하고 변하지 않는 세상을 그렸다면 ‘영주’는 자그마한 희망을 내포하며 그 존재 의미를 스스로 성취한다. 차갑지만 뜨거운 성장의 고통을 지니고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영주’가 큰 힘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22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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