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관객 연대 슬로우시네마 운동

속도전 되어버린 극장가에 ‘느림의 미학’·‘상생의 가치’ 복원 시도

‘1980 사북’·‘3학년 2학기’·‘바람이 전하는 말’, 12월까지 극장 상영 돌입

슬로우시네마 운동 출범 기자 간담회
슬로우시네마 운동 출범 기자 간담회

[헤럴드뮤즈=이미지 기자] 독립예술영화의 짧은 상영 기간과 열악한 배급 현실을 바꾸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된 독립예술영화들이 대형 멀티플렉스 중심의 상영 구조 속에서 개봉 2~3주 만에 극장에서 자취를 감추는 현실이다. 통상 50개 안팎의 스크린을 확보하고, 하루 한 차례 정도만 상영되는 열악한 환경은 독립예술영화계의 오랜 과제로 꼽혀왔다.

이 같은 악순환을 끊기 위해 영화인 9인(박봉남 감독,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 신운섭 작업장 봄 대표, 양희 감독, 이란희 감독, 이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최낙용 한국예술영화관협회 회장, 한경수 프로듀서, 허욱 프로듀서)이 뜻을 모아 새로운 관객 연대 프로젝트 슬로우시네마 운동을 공식 출범했다.

영화 ‘1980 사북’, ‘3학년 2학기’ 포스터
영화 ‘1980 사북’, ‘3학년 2학기’ 포스터

이번 운동은 영화 ‘1980 사북’, ‘3학년 2학기’, ‘바람이 전하는 말’이 어려운 상영 여건 속에서도 입소문을 타며 개봉 100일 이상 장기 상영에 성공한 사례에서 출발했다. 독립예술영화도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관객들과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은 “지난해 11월 마지막 주 금요일에 ‘1980 사북’을 보고 작품의 완성도에 놀랐다. 이렇게 좋은 영화를 더 많은 관객이 봐야 하는데 왜 그러지 못할까 고민하게 됐다”라며 “1980 사북’ 상영위원회를 만들어 상영 운동을 진행하던 중 ‘3학년 2학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도 같은 취지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게 올봄부터 창작자들과 뜻을 모아 슬로우시네마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이란희 감독
이란희 감독

‘3학년 2학기’를 연출한 이란희 감독은 “학생들이 영화를 보고 진로에 대해 이야기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9월 개봉했지만 극장에 걸린 기간이 너무 짧았다. 이제야 학교에서 상영 문의가 오기 시작했다”라며 “영화가 오래 상영돼야 이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관객들을 만날 수 있고, 그분들에게 영화를 보여줄 기회도 생긴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다.

OTT 대신 극장으로..관객과 함께하는 장기 상영

‘1980 사북’, ‘3학년 2학기’, ‘바람이 전하는 말’은 개봉 당시 호평을 얻었지만, 대형 멀티플렉스에서는 한 달도 채 상영되지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일부 관객들은 직접 극장을 대관해 상영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러한 자발적인 움직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슬로우시네마 운동 측은 세 작품을 올해 말까지 OTT와 IPTV 등 온라인 플랫폼으로 넘기지 않고, 극장에서 더 오래 관객들과 만날 수 있도록 상영 운동을 이어갈 계획이다.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은 “요즘은 영화가 개봉하면 곧 OTT나 IPTV로 공개될 것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 같다”라며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전에도 다양한 시도를 해왔지만, 이번에는 관객들과 함께 더 오랜 시간 상영의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뜻을 모아 슬로우시네마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양희 감독
양희 감독

‘바람이 전하는 말’을 연출한 양희 감독은 관객들의 자발적인 참여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우리 영화는 50대 이상 관객들이 많은데, 영화를 본 뒤 가족이나 친구와 다시 보고 싶어도 상영관이 없어 관객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라며 “집 근처 극장을 대관한 뒤 SNS와 중고거래 플랫폼 등을 통해 관객들을 모집했고, 극장 상영이 끝난 이후에도 대관 상영이 60여 차례 이어졌다. 대부분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라고 말했다.

박봉남 감독
박봉남 감독

‘1980 사북’을 연출한 박봉남 감독은 극장 상영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국가 폭력과 성폭력 피해를 다룬 장면이 있는 만큼 OTT나 IPTV로 공개될 경우 장면이 무분별하게 확산되며 2차 가해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라며 “사회적 공론화를 이어가고 지역 공동체 회복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극장에서 함께 영화를 보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라고 부연했다.

관객이 극장을 바꾼다..남은 과제는 ‘지속 가능성’

슬로우시네마 운동의 핵심은 극장이 정한 영화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들이 직접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 극장으로 불러낸다는 데 있다.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포스터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포스터

강욱천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 사무총장은 “기존에는 극장에 걸린 영화 중에서만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발상을 바꿔 관객들이 직접 극장을 대관하고 보고 싶은 영화를 상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됐다”라며 “관객이 주인이 되는 방식이다. 극장은 대관 비용이 보장되고, 제작사는 영화를 계속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으며, 관객들은 원하는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모두에게 윈윈이 되는 구조”라고 알렸다.

슬로우시네마 운동은 관객 후원을 기반으로 한 대관 상영을 이어가는 한편, 향후 멤버십 모집과 크라우드 펀딩도 진행할 계획이다.

다만 이러한 실험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상영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본 이미지는 챗GPT를 활용해 생성되었습니다]
[본 이미지는 챗GPT를 활용해 생성되었습니다]

현재 공동체 상영은 영화를 끝까지 극장에서 보고자 하는 일부 관객과 활동가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영화계는 이 같은 움직임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관객과 극장, 제작사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통합 매칭 플랫폼과 공동체 상영 지원 체계 등 제도적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슬로우시네마 운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소수 영화인의 운동이 아닌 대중이 함께 만드는 새로운 영화 소비 문화다.

빠르게 소비되고 잊히는 콘텐츠 시대, ‘느리게 오래 보는 영화’를 제안한 이들의 실험이 독립예술영화 생태계의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