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이창동 두 거장이 보여준 한국영화의 새로운 길

국내 최초 세로형 시네마 ‘아버지의 집밥’

넷플릭스와 손잡고 올해 베니스 심사위원대상 받은 ‘가능한 사랑’

이준익, 이창동 감독/사진=민경빈 기자
이준익, 이창동 감독/사진=민경빈 기자

[헤럴드뮤즈=이미지 기자]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기존 관행에서 벗어난 과감한 선택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이준익 감독은 ‘아버지의 집밥’을 통해 모바일 숏폼 콘텐츠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세로형 프레임을 극장 스크린으로 최초 가져오며 영화 형식의 물리적 한계에 도전했다. 반면 이창동 감독은 전통적인 투자 시스템의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글로벌 OTT 넷플릭스와 손잡고 8년 만의 복귀작 ‘가능한 사랑’을 완성했다.

형식을 뒤집은 이준익 감독과 제작 환경 자체를 전환한 이창동 감독. 한국영화가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놓인 가운데 두 거장의 파격적인 승부수는 한국영화의 새로운 생존 방식에 대한 의미 있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아버지의 집밥’을 단독 개봉한 롯데시네마 관계자는 헤럴드뮤즈에 “기존의 제작, 상영 문법과 다른 콘텐츠도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다는 하나의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만이 극장적 경험은 아니며, 콘텐츠의 특성에 따라 화면의 형태 역시 새로운 표현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라고 판단한다”라고 분석했다.

이창동 감독의 ‘가능한 사랑’에 투자한 넷플릭스 측은 “국경과 언어를 넘어 누구나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사람 중심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작품의 힘을 확신했다”라고 투자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낯설지만 깊숙하게..모바일 포맷이란 편견 깨고 극장 스크린으로

‘아버지의 집밥’은 40년간 삼시세끼 집밥만 찾던 아버지 ‘하응’이 ‘요리백지증’에 걸린 아내 ‘순애’를 대신해 생애 처음 부엌에 들어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로, 고리타 작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사진=레진스낵 제공
사진=레진스낵 제공

‘왕의 남자’, ‘동주’, ‘자산어보’ 등을 통해 깊은 울림을 선사해 온 이준익 감독의 첫 숏드라마 연출작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으며, 제3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숏드라마 최초로 롯데시네마 단독 개봉을 확정하며 모바일에서 주로 소비되던 숏드라마 포맷을 극장 스크린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회당 2분 안팎의 61부작 숏드라마를 하나의 영화로 재편집한 형태로, 전체 러닝타임은 2시간 26분이다.

롯데시네마 관계자는 “‘아버지의 집밥’은 세로형 숏드라마라는 형식적인 새로움뿐 아니라,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와 배우들의 연기가 극장이라는 공간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했을 때 새로운 관람 경험을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해 단독 개봉을 결정했다”라며 “개인의 모바일 화면에서 주로 접해온 세로형 콘텐츠를 여러 관객이 대형 스크린으로 함께 보고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 자체에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라고 밝혔다.

이준익 감독은 세로형 시네마의 장점으로 인물의 내면에 더욱 깊숙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가로 그림은 풍경 속에 사람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풍경이다. 세로 그림은 대부분 인물이거나 초상이다. 인물, 초상화같이 세로형 시네마는 한 인간의 내면을 깊숙이 엿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더라”라며 “가로보다 훨씬 더 깊숙이 들어가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라고 부연했다.

제작비 측면에서도 세로형 시네마의 장점이 있다. 이준익 감독은 “보통 우리나라 시장에서 숏드라마 평균 제작 비용이 1억 5000만원이다. 우리는 규모 있게 해서 5억원 정도 들어갔다. 가로로 찍었다면 제작비가 아무리 적게 들어도 5배 이상 들었을 거다”라며 “결과적으로 고비용, 저비용 차이가 가로와 세로의 차이이기도 하다. 스태프, 장비 등에 있어서도 대체로 규모가 작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작을 수는 없다. 이야기의 풍부함을 보여줘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사진=레진스낵 제공
사진=레진스낵 제공

이준익 감독은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만들 때 극장 상영 계획은 전혀 없었다. 찍고 나서 보니까 극장에서 세로로 한 번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최근 이런 종류의 가족 영화라든가 드라마에 충실한 영화가 예전보다 적은 것 같다. 나이 드신 관객들이 자기 나이에 맞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예전보다 줄지 않았나 싶어 세로가 됐든 가로가 됐든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극장에서 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투자자에게 제안했다”라고 알렸다.

배우들 역시 세로형 시네마의 가능성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진영은 “어떤 창으로 봐도 좋은 이야기가 전제된다면 관객들이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이정은은 “다양한 층에서 볼 수 있는 좋은 이야기들을 좋은 장소에서 틀 수 있다면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좋은 시도라고 여겨진다”라고 말했다.

실제 세로형 시네마를 접한 관객들 역시 처음에는 기존 가로형 스크린과 다른 화면 구성에 낯설게 느끼다가도, 인물과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며 새로운 관람 방식에 만족감을 표하고 있다.

“영화는 만들어져야 한다”..이창동, 넷플릭스와 손잡고 8년만 복귀

이창동 감독이 지난 2018년 ‘버닝’ 이후 8년 만에 신작 ‘가능한 사랑’을 선보이는 가운데 기존의 극장 배급 방식에서 벗어나 넷플릭스와 손잡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과 그녀의 남편, 두 부부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만나 서로 다른 삶과 숨은 욕망을 마주하는 이야기.

이창동 감독은 당초 ‘가능한 사랑’을 여느 작품처럼 극장용 영화로 제작하기 위해 국내 투자자들을 찾았지만, 침체된 영화 시장에서 투자처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상황에서 손을 내민 곳이 넷플릭스였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사진=넷플릭스 제공

이창동 감독은 “넷플릭스가 처음부터 신뢰를 가지고 이 작품을 함께하고 싶어 했다. 우리가 극장용 영화로 만들기 위한 투자를 찾을 때도 기다려줬다. 현실적으로 여의찮게 됐을 때도 작품과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줘서 고맙게 생각했다”라며 “절대적으로 감독으로서의 독립성을 인정해 줬다. 지금까지 영화 중 가장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라고 흡족해했다.

그러면서 “작년 전반기가 한국영화 산업의 체질이 가장 약화된 시기였고 앞으로 얼마나 회복될 것인지 의구심이 있었던 때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만들어져야 한다’라고 생각했다”라며 “우리 모두 느끼고 있듯 영화 산업의 구조는 이미 바뀌고 있고 그 변화의 추세는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극장용 영화와 스트리밍 서비스, 두 개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영화들이 관객들과 어떻게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것 같다”라고 소신 발언을 했다.

무엇보다 ‘가능한 사랑’은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품에 안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이창동 감독은 2002년 ‘오아시스’로 제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감독상)을 받은 데 이어 24년 만에 다시 베니스에서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게 됐다. 특히 한국영화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것은 ‘가능한 사랑’이 최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사진=넷플릭스 제공

이창동 감독은 수상 직후 “수많은 사람들의 기다림과 인내가 없었으면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거다. 이 영화를 같이 만든 모든 분들과 지금 느끼는 감정을 나누고 싶다. 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믿고, 제작이 가능하도록 해 준 넷플릭스에 감사드린다”라며 “노동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끊어져 가는 시대에 저는 영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영화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질문하기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이 상을 주신 것은 그 질문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알겠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강동한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 부문 VP는 “‘가능한 사랑’에 담긴 이창동 감독님만의 시선과 세계 최고의 배우, 제작진의 노력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인정받아 무척 기쁘다. 넷플릭스를 믿고 함께해 주신 ‘가능한 사랑’ 제작진과 배우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라며 “넷플릭스는 앞으로도 한국영화계의 장기적인 파트너로서 다양한 영화가 꾸준히 만들어지고 더 많은 팬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함께하겠다”라고 기쁜 마음을 드러냈다.

넷플릭스는 ‘가능한 사랑’의 극장 개봉을 먼저 진행한 뒤 스트리밍으로 공개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품은 오는 23일 극장에서 먼저 관객들과 만나며, 이후 11월 6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스크린 양옆을 과감히 비워내고 극장 한가운데 세로 프레임을 세운 이준익 감독과, 기존 투자·배급 시스템을 넘어 글로벌 OTT와 협업한 이창동 감독. 형식을 바꾸고 제작과 유통의 방식을 전환한 두 거장의 선택은 한국영화가 변화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기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각자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아 나선 두 감독의 행보가 한국영화의 다음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