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려진 시간' '범죄의 여왕' '춘몽' '걷기왕' 스틸 /쇼박스, 콘텐츠 판다, 스톰픽쳐스코리아/프레인 글로벌, CGV 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가려진 시간' '범죄의 여왕' '춘몽' '걷기왕' 스틸 /쇼박스, 콘텐츠 판다, 스톰픽쳐스코리아/프레인 글로벌, CGV 아트하우스 제공

[헤럴드POP=성선해 기자] 사람에게는 각자의 진가가 드러날 때가 있다고 한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온다고. 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 개봉 시기를 잘못 택하면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가 태반이다. 흥행에 운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올해도 그런 영화들이 있었다. 평은 좋으나 작은 소용돌이로 끝난 이야기들. 영화 한 편이 탄생하기까지 적어도 몇 년이 소요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준비했다. 어쩌면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는, 하지만 알게 된다면 마음 한켠에 품어두고 싶을 영화들이다.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 / 콘텐츠 판다 제공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 / 콘텐츠 판다 제공

◆ '범죄의 여왕'

지난 8월 개봉한 '범죄의 여왕'(감독 이요섭/제작 광화문시네마)는 여러모로 독특한 작품이다. 여자, 아니 아줌마가 탐정의 포지션으로 전면에 선 스릴러다. 아들이 사는 고시원에서 수도요금 120만 원이 나오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또 다른 사건을 감지한 미경(박지영)의 이야기다.

미경은 칼과 총을 들진 않았지만, 특유의 오지랖과 모정, 그리고 '촉'으로 고시원을 둘러싼 살인사건의 미스터리에 접근한다. 그의 사이드킥(sidekick)은 관리인 개태(조복래)가, 정보원은 고시 장수생 덕구(백수장)가 활약한다. 아줌마, 고시 전문가, 십시, 게임 폐인 등 고시촌의 다양한 군상이 포진한 캐릭터 무비다. 특히나 미경과 개태는 여러 가지 상상의 여지가 있는 미묘한 관계로 보는 재미를 더한다. 모자와 연인 사이를 넘나든다.

영화 '걷기왕' 스틸 / CGV 아트하우스 제공
영화 '걷기왕' 스틸 / CGV 아트하우스 제공

이렇듯 '범죄의 여왕'은 장르의 전형적인 공식을 깬 작품으로 호평받았다. 뿐만 아니라 조복래, 백수장, 허정도, 김대현 등 깊은 잔상을 남기는 배우들의 향연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총 누적관객 수는 4만3823명으로, 손익분기점 달성에는 실패했다. 관객 접근성이 떨어지는 시간대에 극장을 배정받은 탓이 컸다. ◆ '걷기왕'

'걷기왕'(감독 백승화/제작 인디스토리) 역시 호평과 흥행이 비례하지 않았던 경우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선천적 멀미 증후군 여고생 만복(심은경)이 경보에 도전하며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충무로 최연소 흥행퀸' 심은경이 타이틀롤로 나섰다.

'걷기왕'은 무조건 빨리, 무조건 열심히를 당연시 여기는 세상을 향해 물음표를 던진다. 경쟁에서 뒤처지면 실패한 인생이라 낙인 찍는 어른들에게 '그런데 왜 끝없이 달려야 하나요?'라고 되묻는, 상당히 발칙한 작품이다. 게다가 만복은 열정이나 패기와 거리가 먼, 뭐든 적당히 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의욕 없는 주인공이라니, 대체 이 이야기가 어디로 굴러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하지만 '걷기왕'은 만사가 귀찮은 만복의 도전을 통해 무한 경쟁의 굴레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청춘에게 위로를 건넨다. 경쟁에 뛰어들 수는 있지만, 거기에 삶이 함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포기를 한다 해도 그건 패배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임을 보여준다. 메시지는 묵직하지만 전달하는 방식은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영화 '춘몽' 스틸 / 스톰픽쳐스 코리아, 프레인 글로벌 제공
영화 '춘몽' 스틸 / 스톰픽쳐스 코리아, 프레인 글로벌 제공

◆ '춘몽'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 '춘몽'(감독 장률/제작 률필름)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수색역 부근에 사는 세 남자 익준(양익준), 정범(박정범), 종빈(윤종빈)과 그들의 여신, 예리(한예리)가 사는 세상을 담았다.

'춘몽'은 참신한 시도가 돋보인 작품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군도'의 윤종빈 감독, '똥파리' 양익준 감독, '무산일기' 박정범 감독이 한예리와 함께 주연으로 나섰다. 이들은 자신이 연출하고 연기한 전작의 캐릭터를 그대로 빌려와 '춘몽'에 등장한다. 다들 어딘가 하나쯤은 나사가 빠진듯하지만, 사랑스러운 인물들이다.

장률 감독은 한 여자를 매개로 유사가족의 형태로 지내는 수색역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굴다리 하나만 지나면 고층 빌딩과 방송국이 즐비한 DMC이건만, 이들이 사는 공간은 시간이 멈춘듯하다. 서로 다른 두 동네의 분위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장률 감독은 수색역의 아날로그 정서에 초점을 맞춰 네 남녀의 꿈같은 시간을 그렸다.

영화 '가려진 시간' 스틸 / 쇼박스 제공
영화 '가려진 시간' 스틸 / 쇼박스 제공

◆ '가려진 시간'

모두가 '반드시 흥행할 것'이라 입을 모았지만, 불운이 따랐던 작품도 있다. 지난 11월 16일 개봉했던 '가려진 시간'(감독 엄태화/제작 바른손E&A)이다. 흥행 보증수표 강동원과 '잉투기'를 연출한 충무로 유망주 엄태화 감독이 뭉친 작품이다.

'가려진 시간'은 화노도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사건 후 단 며칠 만에 어른이 되어 나타난 성민(강동원)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준 단 한 소녀 수린(신은수)의 이야기로, 뒤틀린 시공간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을 담았다. 충무로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감성 판타지다.

"한국에서 못 봤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엄태화 감독은 섬세한 연출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시간이 멈춘 세계를 구현했다. 뛰어오르던 고양이는 허공에 멈췄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물리적인 법칙이 통하진 않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세계는 관객에게 놀라운 시각적 체험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려진 시간'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스핀오프 '신비한 동물사전'과 대결에서 힘을 쓰지 못 했다. 결국 누적관객 수 51만 명을 기록하며 극장가에서 퇴장했다. 개봉 시점을 잘못 택한 것. 실관람객들의 호평과는 대조적인 성적이었기에 더욱 아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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