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숨 소리가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는 가까운 거리. 관객도 배우도 낯선 근거리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전쟁의 참상이다. 눈 앞에서 격정적인 몸 싸움을 하고, 총구를 들이대며, 피를 흘리는 것. 그것도 연기로서 만들어낸 극한 상황이지만 꾸민 티가 나면 안되는 어려움 속에서 시간이 흐를 수록 성장하는 배우가 있다. 바로 오종혁이다.

오종혁이 연극 '벙커 트릴로지'(제스로 컴튼 프로덕션/연출 김태형, 작가 지이선)에서 맡은 역은 솔져2로 '모르가나'에서는 아더 역, '아가멤논'에서는 요한 역, '맥베스'에서는 마크 역으로 분한다. 낯설음 투성인 이 연극을 선택한 이유를 물으니 "하고 싶은 요소가 다 들어있었다. 어렵겠지, 힘들겠지 하는 생각보다도 먼저 '하고 싶다, 꼭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즉답했다.

욕심이 앞섰던 선택이니만큼 쉬운 길은 아니었다. 웃음 소리가 떠날 줄 모르는 연습실에서 오종혁은 혼자 벽으로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에피소드가 3개이다보니 연습 템포가 빨랐다. 나는 하나도 모르겠는데 다음으로 넘어갔다. 다들 너무 즐거워하고 연습실 분위기 너무 좋다고 하는데 나는 벽으로 꺼져서 갇힌 기분이 들었다. 이석준 형(솔져1 역)에게 전적으로 의지한 부분도 많다.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형이 나를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나에게 석준 형의 영향력은 크다. 형의 조언이 필요한 순간 알아차리고 와서 딱 말해준다.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맞게 가고 있다'든지 '잘못됐다'고 지적을 받으면 명확해지면서 뭐든 방향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막 일주일 아니, 몇일 전까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관객석에 앉아보면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친다. 손을 뻗어 손이 닿을 정도가 아니라 발을 가지런히 모아 의자에 붙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대 위 배우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질 것 같은 거리다. 여느 소극장보다도 가까워진 거리의 관객이 부담스럽는 않은지, 또 시선처리는 어렵지 않은 걸까.

"관객석이 공간처럼 느껴진다. 정말 숨소리도 안들리게 조용히 보신다. 오히려 내 숨소리가 공연에 방해될까 걱정이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단차 사이를 보고 이런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집중이 되면 관객 얼굴이 인지가 안된다. 오히려 공연이 안풀리는 날은 관객이 보인다. 그 순간부터 스스로 관객의 눈치를 보게 된다."

'벙커 트릴로지' 리허설 당시 텅 빈 관객석을 보며 오종혁은 '이 정도 위치에 시선이 있을 것이고, 거리가 이 정도면 닿을 것 같다'고 상상을 하면서 더 긴장을 하게 됐다고. 반대로 관객과의 거리가 가까워 생긴 에피소드도 있다.

"죽어서 누워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격정적인 장면을 마치고 숨을 가프게 쉬면서 죽었다. 최대한 숨을 참다가 아무래도 위 쪽에 있는 관객이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해서 실눈 떠서 봤는데, 고개를 옆으로 돌리시고 있었다. 숨결이 닿는게 싫으셨나보다. 공연 들어가기 전에 양치도 하는데.."

연기를 하다가도 관객이 움찔하면 어쩔 수 없이 보인다는 오종혁은 "'파멸이여 오라! 차라리 운명과 싸우겠다!'는 대사가 침이 튈수 밖에 없는 발음이다. 그런데 정말 관객에게 침이 튀었나보다. 갑자기 '움찔'하시고 얼굴을 닦아내셨다"고 말하며 웃었다. 그는 "공연에서 오히려 관객 분들이 도와주셔서 시선에 대한 부담은 없다."고 전했다.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모든 에피소드에 몸 싸움 요소가 들어있다. 관객이 가까워진 만큼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것은 무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로 때리고 싸운다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요령껏 피하면서 액션신을 소화하는 건지 궁금했다.

"넘겨지는 건 진짜로 넘어가고 던져진다.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는데, 총이나 칼을 사용할 때는 거의 닿을때 쯤 뺀다. 최대한 진짜처럼 연습하려고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특히 칼은 비껴 찌르는데, 잘못해서 상대방의 갈비뼈 같은 곳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칼이 강한 고무 소재라 플라스틱과 비슷해 찔르면 아프다. 칼이 잘 들어가면 '윽'하고 반응하는데, 잘못 찌르면 '움찔'하고 계속 덜덜덜 떠는 게 느껴진다(웃음). 그럴 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가끔을 제외하고는 약속한 대로 딱 맞게 움직인다."

전쟁 참상이라는 다소 무거운 소재의 연극이지만, 그 안에서 피어나는 애드리브 욕구는 숨길 수 없다. 초반에는 대본에 충실히 캐릭터를 구축해간 반면, 슬슬 변화에 대한 욕심이 타오르며 가끔 애드리브를 시도한다.

"센스나 순발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애드리브를 하면 발음이 꼬인다. '아가멤논'에서 '사실은 부인이 하시는게 나을 수도 있어요'라는 대사가 있다. 세 에피소드가 교묘하게 상황이 겹쳐있는 부분이 많다. 연습할 때는 못 찾아냈다가 상황이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이 대사 써볼까'하고 다른 걸 떠올렸다가, 0.1초 안에 정리했는데 호흡이 틀려지니까 '사실은 부인이 하시는게 나을 수도 이써라'라고 말했다. 다시 바로 잡기는 했지만 이미 상대 배우가 웃음이 터진 상태였다."

애드리브 정도는 애교다. 오종혁은 '맥베스'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소품인 편지를 빠뜨리고 나간 적도 있다. 공연이 끝난 뒤 팬들의 퇴근길 배웅을 받으며 고백했다는 이 실수담은 팬들에게는 질책을 받았지만 오종혁의 센스가 돋보인 장면이기도 하다.

"하루는 편지를 꺼내야 하는 장면에서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도 편지가 나오지 않았다. '아뿔싸'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음을 어필하는 장면이기에 편지에 상응하는 것을 찾았다. 그래서 나간 대사가 '홍차라도 한잔 하시겠느냐'는 말이었다. 맥베스를 전에 보셨던 관객들이 '오늘부터 홍차로 바뀌었느냐'고 묻는데, 실수라고 고백했다. 엄청 핀잔을 받았다(웃음).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시대에 '편지로 써서 택배로 부칠께요' 이건 말이 안 되니까."

실수투성이로 계속해서 성장중인 오종혁은 솔져2 역에 더블 캐스팅된 배우 신성민에 대한 부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저 부러운 것도 아니고 "내가 성민이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신성민이 너무 부럽다. 나는 어떤 디렉팅 받았을때 그 느낌을 한번에 낼 수 없다. '이 느낌이야!'하고 내안에 정해진게 있으면 바꾸는게 쉽지 않다. 그런데 성민이는 주는대로 착착 변한다. 모든 것에 열려있는 친구다. 성민이가 연기하는 걸보면 에너지가 느껴진다. 빵하고 터지는 에너지다. '맥베스' 같은 경우는 광기로 공간을 채워야하는데, 나는 마지막에 뭔가 열리지 않고 혼자 미쳐가는 느낌이다. 성민이는 빵 터지면 '아 저 미친놈..'이라는 말이 무심코 나올 정도다. 그런 성민이를 보면서 자극을 받는다. 나도 공연 하면서 조금씩 빗장이 열리는 느낌이다."

평일 공연에서는 하루 두 에피소드를, 주말 공연에서는 세 에피소드를 공연한다. 특히 평일 공연에서는 역할을 바꾸는데 약 15분 정도의 시간 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비교적 수월하다는 주말도 50분 정도의 재정비 시간이 주어질 뿐이다. 쉽지 않은 공연을 벌써 한 달 반 넘게 해온 오종혁이지만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설명한다.

"'벙커 트릴로지'를 알것 같다가도 하다보면 또 모르겠다. '아 이게 트릴로지구나' 깨닫고 이런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마인드를 바꿀 시간이 필요 하다는 걸 인지한 뒤, '이정도면 알겠다!' 하면서도 항상 촉박하다. 평일에는 그전 에피소드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모르가나'에서 아더는 마지막에 친구들 잃은 것을 느끼며 미안함과 후회, 슬픔을 한방에 울음에 담아 팡 터트린다. 그런 후에 바로 광기를 뿜어내야하는 '맥베스'로 가려면 정리가 안된다. 가끔 울먹울먹한 상태로 마크가 되기도 한다. 역에서 빠져나오는게 좀 느리고, 아직까지 나를 못 깨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마지막 공연 때까지 그럴 것 같다."

(사진 제공=아이엠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