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방문을 열고 기억을 넣어 둬, 방문을 닫고 천천히 도망쳐!"

첫 시작부터 음침하다. 공연장의 암전이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무대는 여전히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백열 조명을 배경으로 배우들은 그림자 놀이를 시작한다. 인형극을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때쯤, 관객들은 어느새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듯 그들의 추리극에 입장한다.

1926년 독일, 저명 심리학자 그라첸 슈워츠 박사의 대저택에서 방화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큰 화재였기에 저택은 모두 연소되고 시체도 훼손되어 알아 볼 수 없게 됐다. 그 가운데 4명의 아이들(한스 시몬, 헤르만 디히터, 안나 레아, 요나스 엥겔스)은 생존했고, 대신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다. 아이들을 구한 사람은 그라첸 박사의 연구 조교이자 아이들의 보모였던 메리 슈미트. 화재 범인을 찾기 위한 진술에서 모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가운데, 첫째인 한스만이 기억이 떠오른다고 주장하며 메리를 유력한 용의자로 만든다. 수사를 받던 메리는 극적으로 도주하고 그로부터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 네 사람이 가진 불행은, 어렸을 적 '나치당'이자 박사의 신분이었던 아버지 그라첸 슈워츠에게 받은 학대적인 실험이다. 매주 수요일, 폭력·전기 충격 등 몸에 상처가 남는 실험을 받은 그들은 이상하게도 수요일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자신들의 몸에 생기는 상처에 가끔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네 사람은 최면으로 지워진 기억의 영향과 더불어 누군가를 향해 막연한 의심을 품기에는 너무 어렸다.

유일한 보호자였던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화재로 연소된 저택으로 갈 곳 없어진 네 자매는 다른 곳으로 입양되어 뿔뿔히 흩어져 자란 뒤 어느새 어른이됐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모였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인 것 같은 보모 메리를 찾으려한다. 첫째 한스는 나치당이었던 아버지의 수첩을 읽고 과거에 자신들이 당한 실험에 대해 인지 후 동생들과 아버지 죽음에 대한 어떤 사실을 확인하려 한다. 하지만 헤르만은 "메리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냐 생각하느냐. 사실 형이 죽인 것이 아니냐"며 형과 대립 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헤르만의 마음 속에는 '사실 내가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뮤지컬 '블랙메리포핀스'(프로듀서 최진/연출·극작·작곡 서윤미)는 심리 추리 스릴러다. 다만 평범한 추리 장르가 범인을 찾아나서는 것이 보통이라면, 이 이야기의 중심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에 초첨을 맞추고 있다. WHO보다 WHY를 부각시키기 위해 극의 스토리는 촘촘하게 짜여진 느낌을 받는다. 이야기 흐름을 오롯이 배우들의 연기로 이끌어가기 위해 음악과 세트, 조명 등의 화려함을 줄였다. 하지만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음악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충분했고, 빨강 파랑 녹색이 주를 이루는 조명은 극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며 관객들의 집중도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온몸으로 연기를 선사하는 배우들이 존재한다. 주인공 네 사람은 성인이 되어 만났지만, 과거로 플래시백 하는 장면에서는 행동과 목소리를 바꿔 어린 아이로 변한다. 첫 회상 장면은 춤을 추다가 갑작스럽게 성인에서 어린 아이로 변해 관객들을 잠시 혼란스럽게 하지만, 배우들의 명연기는 현재와 과거를 명백히 구분할 수 있게 만든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무대는 한정적인 공간이다. 이번 4번째 시즌 공연의 콘셉트인 '헤르만 - 최면의 방'이 그들의 무대다. 테이블이 뒤집힌 듯한 회전 무대와 삐딱한 천장의 장치, 그리고 규칙없이 나열된 계단과 방문으로 이뤄진 뒷 배경은 뒤틀려진 분위기를 연출하며 관객들에게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마주하게 한다.

배우들은 동선 이동과 작은 율동만으로 감정을 드러낸다. 이처럼 절제된 감정 표현은 음향 효과 및 조명과 어우러져 더욱 극단적으로 다가온다. '주머니에 칼 있었다'는 한스의 불안감,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면의 폭력성을 느끼는 헤르만. 동생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두 사람이지만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었던 어렸을 적 그들은, 결국 실험에 내던져진 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리고 동생들을 껴안고 메리에게 "최면을 걸어달라"고 요청한다. 이제껏 최면으로 자신들의 인생을 잃어온 그들은 결국 힘겹게 최면에 취하며 악몽의 장소에서 달아난다.

힘겹게 도망친 뒤, 각자 다른 환경에서 같은 아픔을 품고 자라온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는 다 같이 행복해지기 위해 메리가 말한 믿을 만한 사람인 로먼 박사를 찾아간다. 다 떠올라버린 끔찍한 학대와 실험의 트라우마를 털어버리기 위해 그들이 다시 겪어야 하는 치료 방법은 '최면.' 불안한 듯 앉아 이야기를 풀어낸 헤르만, 그리고 옆을 지키고 있는 한스, 안나, 요나스. 이대로 다시 최면에 빠져 기억을 삭제하나 싶었지만, 가장 최면에 강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막내 요나스는 최면 치료를 거부한다. "이 방을 나가면 그 기억을 안고 살아야 한다"한다는 로먼 박사의 충고에도 흔들리지 않은 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불행과 기꺼이 동행하겠다"는 말로 아팠던 기억과 고통에 정면으로 마주하며 행복해질 준비를 시작한다.

"방문을 열고 기억을 넣어 둬, 방문을 닫고 천천히 도망쳐." 그동안 아프고, 도망치고 싶었던 현실을 '최면'의 무의식 세계에 숨겨온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 그들은 무거운 기억을 방문 저편에 두고 무의식으로 도망쳤던 수 많은 어린 날을 벗어나 이제 의식이 깨인 성인이 되었다. 자신들을 짓누르는 기억의 무게를 당당히 견디며 이제는 행복을 찾는 네 사람이 다 같이 행복해지는 날을 볼 수 있기를.

지난 10월 14일 개막 후 여전히 관객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화제작 '블랙메리포핀스'는 4년 전 초연은 물론, 2013년과 2014년 재연 때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앞선 시즌에서 첫째 한스 시몬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 반면, 올해 열린 4번째 시즌에서는 헤르만의 시각에서 연극이 진행돼 과거 같은 작품을 봤다 하더라도 새로운 감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한층 파워 업된 배우들이 무대를 이끈다. 한스 시몬 역 이경수·에녹·김도빈, 헤르만 디히터 역 전성우·강영석, 안나 레아 역 송상은·안은진·이지수, 요나스 엥겔스 역 이승원·박정원, 메리 슈미트 역 전혜선·홍륜희·김경화가 출연한다. 내년 1월 15일까지 대학로 티오엠 1관에서 공연.

(사진 제공=아시아브릿지컨텐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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