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어깨를 어루만져주는 진정한 힐링극."

음악극, 그것도 라흐마니노프의 삶과 음악이 함께 녹아있는 작품. 거대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어려울 것이라 짐작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현악 6중주는 청각을 만족시키고, 라흐마니노프의 스토리는 감동을 전한다. 음악을 따라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다. 낭만주의의 대미를 장식한 피아노 협주곡의 거인이지만 그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다. 뛰어난 피아노 실력과 작곡으로 러시아 음악계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젊은 시절 그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교향곡 1번을 발표한다. 하지만 연주회는 실패로 끝나고, 사람들의 말로 인한 상처 때문에 음악을 멈춘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런 라흐마니노프에게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가 찾아온다. 처음에는 철벽 방어로 달 박사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던 라흐마니노프는 능글맞고 포기를 모르는 달 박사와 어느새 동화되어 지내게 된다. 함께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두 사람.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마음에 끊임없이 노크하는 달 박사에게 어느새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2인극 특성상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예민하고 섬세한 라흐마니노프와 그와 반대되는 성격의 달 박사. 달 박사는 그 라흐마니노프 앞에서 배운지 3개월 된 실력으로 어설프게 비올라를 '끼익'거리며 연주해 라흐마니노프를 버럭하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라흐마니노프는 달 박사의 초보 수준의 연주에 멋진 피아노 반주를 선사하며 들을만한 음악을 만들어준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음악으로 표현된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배우의 연기와 음악이 함께 스토리를 이끌어나간다. 그래서 더 의미가 깊고, 감성적으로 와 닿는다.

음악계 거장을 그려낸 작품이지만 재미를 불어넣는 요소 또한 빠지지 않았다. 바로 니콜라스 달 박사를 연기하는 배우의 1인 多역이 이런 역할을 한다. 달 박사를 연기하는 배우는 라흐마니노프의 스승 쯔베레프와 차이코프스키로 분한다. 쯔베레프는 세상 차가운 인물로 라흐마니노프에게 모진 말과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는 등 인간미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뒤에서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내 뒤를 이을 제자"라고 칭찬하는 인물이다. "교향곡을 누구보다 빨리 쓰고 싶다"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즐거우려고 하는 건 취미야. 목표를 가지고 하는 게 예술"이라고 딱 잘라 말한 쯔베레프는 모차르트, 베토벤, 리스트 등 다양한 거장들의 쉽지 않은 음악으로 그를 단련시켜 누구보다 빠르게 목표에 닿을 수 있도록 만든다.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성에 반한 차이코프스키로 분해서는 몸을 푸는 발레 동작으로 인물 특성을 나타내며 막간 웃음을 선사한다. 목소리 톤의 변화, 행동하는 몸 선의 변화 등 한 배우의 다(多)역 연기는 연기적 다채로움을 느끼게 하며 극의 흥미를 높인다.

'라흐마니노프'가 '힐링극'으로 불리는 데는 대사의 역할이 한몫한다. 극 초반에 나오는 라흐마니노프의 대사 "악수 안 합니다. 악수를 하면 관계가 생기니까. 스쳐 지나갈 사람과는 악수를 안합니다"는 이미 관객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이 대사는 라흐마니노프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는 동시에 극 후반에 변한 두 사람의 관계성을 쉽게 이해시켜 준다.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하고자 하는 달 박사의 대사는 그야말로 어깨를 토닥여주는 힐링 대사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에게 "당신은 새로운 곡을 쓰게 될 거에요. 새로운 곡을 쓰게 되면 관객들이 당신을 사랑해 줄 것 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말로 좋은 기운과 응원을 건넨다. 달 박사는 혼란스러워 하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왜 곡을 쓰는지"를 끊임없이 물으며 "내가 궁금한 건 당신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에요. 무슨 마음으로, 무얼 느끼길 바라면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누구를 위해서! 새로운 곡을 쓰려는 건지 말해주면 내가 치료를 하든 말든 할 것 아닌가"라는 말과 함께 누구도 다가오지 못했던, 그리고 궁금해하지 않았던 영역에 침투한다. 달 박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라흐마니노프는 협주곡 2번을 완성시키고, 호평 세례를 받으며 작곡가로서 명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 곡을 니콜라이 달 박사에게 헌정한다.

배우가 이끌어간 무대 위 이야기가 내용을 전달하고 보여주는 부분이었다면, 그 감성을 더욱 아름답고 황홀하게 어루만져 준 것이 음악이다. '라흐마니노프'라는 제목에 맞게 슬픔의 3중주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3번, 교향곡, 오페라, 파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등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배경이나 넘버로 쓰인다. 물론 극에 맞도록 재구성된 부분도 있지만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없다.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은 그가 만든 음악 그 자체로 표현될 수 있기에, 대사와 넘버보다 음악이 주는 감동은 거대하다. 더불어 음악적 부분에서 독보인 부분은 두 명의 피아니스트가 어린 라흐마니노프로서 선사하는 개인기에 가까운 베토벤, 모차르트, 리스트 등의 피아노 연주다. 이는 또 하나의 환상적 전율을 선사하며 극을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든다.

"이미 당신은 사랑받는 음악가 입니다. 당신이 새로운 곡을 쓰건 쓰지 않건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라고 라흐마니노프에게 긍정적인 희망을 심어주던 달 박사는 극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보았을까. 아니,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넓고 깊고 복잡하니까. 그래서 아름답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음악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이야기로 공감을 얻고, 그의 음악으로 감동을 선사하며, 달 박사의 대사로 마음을 어루만지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라흐마니노프 역을 연기한 배우 박유덕은 음악가 특유의 예민하고 섬세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다. 짜증스러운 성격으로 달 박사에게 크게 소리치던 그가 촉망받던 청년 라흐마니노프를 연기 할때는 마치 정말 다른 사람인 듯 눈에서 생기가 돌았다. 이후 왜 교향곡을 빨리 만들고 싶었는지, 그 곡을 들려주고 싶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자신을 드러낼 때는 누구보다 슬프고 고귀한 존재로 라흐마니노프를 그려내는데 탁월한 연기력을 발산했다. 니콜라이 달 박사 역의 배우 김경수는 달 박사 그 자체였다. 처음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뒤 "가방이 무겁다"면서 천연덕스럽게 동선 이동을 하거나, 1인 다역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할 수 있는 포인트를 콕 집어낸 그는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의 투닥 케미를 120% 끌어낸 공로자다. 특히 김경수는 능청스러운 연기를 마치 자신의 본 모습인 것처럼 소화하며 극에 몰입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작년 7월 초연 후 많은 성원에 힘입어 올해 2월 앙코르 공연으로 돌아온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초연 멤버 라흐마니노프 역 박유덕·안재영, 니콜라이 달 박사 김경수·정동화가 그대로 참여했다. 또한 제3의 배우라 불리는 피아니스트에 기존 이범재에 신예 박지훈이 합류했다. 기존 4중주(바이올린1, 바이올린2, 첼로, 비올라)였던 악기 구성은 1st 바이올린과 콘트라베이스의 추가로 풍성해진 선율을 선사했다. 오는 3월 12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

(사진 제공=HJ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