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를 하다 실수로 정차된 모범택시의 뒷범퍼를 받았다. 아주 살짝. 민감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래도 접촉사고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 차 밖으로 나와 미안하다는 뜻도 전할 겸 모범택시의 동태를 살핀다. 그 때, 택시 문이 열리며 기사가 나온다. 한 두 발짝 걷더니 갑자기 쓰러진다. 그리고는 고함을 지른다.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목이야… 나 죽네.” 다른 택시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와 거든다. “빨리 경찰 불러!”
그런데 이상하다. 왜 구급차는 안 부르지? 그래서 대신 부른다. 보험회사에도 전화해 직원을 부른다. 이윽고 경찰이 출동하고 구급차가 도착한다. 보험회사 직원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주위 사람들도 몰려든다. 온통 난리다. 상황을 살펴 본 보험회사 직원은 웃기만 한다. 그리고는 알아서 처리하겠단다. 경찰이 다가와 경찰서로 따라오란다. 사고경위서를 작성한 후 벌금을 낸다.
약 한 달 후. 보험회사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잘 처리되었단다. 보상금도 섭섭하지 않게 줬단다. 한 달씩이나 입원을? 속상한 마음에 직원에게 한 마디 한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편해지는군요.” 직원은 웃으면서 말한다. “다들 그렇게 하는데 아마추어처럼 왜 그러세요?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런 겁니다.” 필자가 겪은 실화다.
영화 ‘암살’을 본다. 1,000만 명 이상이 봤다는데. 도대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다. 일제시대가 배경이다. 강민국(이경영)은 친일파. 자신의 영달을 위해 아내와 친 딸을 죽인다. 그런데, 그가 나오는 장면마다 모범택시 기사가 오버랩된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편해진다.” 염석진(이정재)은 일제의 ‘밀정’이다. 그 역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독립군을 배신한다. 그리고는 일본군 가와구치 사령관과 친일파 강민국을 없애려는 ‘암살단’의 작전을 방해한다. 또 모범택시 기사가 오버랩된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편해진다.”
자동차 접촉사고로 돌아가 보자. 모범이란 말에는 ‘양심적’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을 터. 그 기사의 양심에는 털이 나 있었나 보다. 그 정도 접촉으로 허리가 어떻게 되었나? 그 정도 접촉으로 목 뼈라도 부러졌나? 세상에 ‘오버’도 그런 ‘오버’가 없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보험회사 직원이 병원에 들렀을 때 그 기사는 동료들과 자신의 ‘무용담’을 공유하고 있었단다.
영화 ‘암살’로 돌아가 보자. 강민국의 말투나 행동거지로 미루어 볼 때, 그에게도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것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조금만’ 비겁해지기로 한 것 같았다. 일본의 ‘개’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래야 인생이 편해지니까. 염석진에게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이상, 일말의 ‘양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조금만’ 비겁해지기로 했다. 그래야 살 수 있고, 또 인생이 편안해질 수 있으니까. 옆에서 죽어간 동료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영화 ‘암살’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라는 화두를 관객들에게 던졌다. 그리고 답도 주었다. 세 부류에 대한 ‘응징’이다. 일제, 친일파, 그리고 변절자. 그런데 이상하다. 1,0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는데도 아직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일제 비판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나머지 두 부류는 그냥 넘어가자는 것인가? 후손들한테까지 그럴 필요가 있느냐고? 그렇다면 지금의 일본인 역시 일제 후손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일본에게 그러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역사를 왜곡하는 한 우리는 지금처럼 해야 한다. 다만,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만큼 친일파와 변절자 역시 같은 잣대가 적용돼야 한다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럴 분위기는 앞으로도 형성될 것 같지가 않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문제는, 알고 있는데도 침묵하는 데 있다. 혹시,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편안해진다는 생각 때문은 아닐까?
합리적 선택 이론으로 설명해 보겠다. 어떤 건물의 입주자들이 엘리베이터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돈을 모으기로 했다고 하자. 입주자들은 다음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첫 번째, 나도 돈을 내고 나머지 입주자들도 돈을 내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경우. 두 번째, 나는 돈을 내지 않고 나머지 입주자들이 돈을 내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경우. 세 번째, 나만 돈을 내고 나머지 입주자들이 돈을 내지 않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못하는 경우. 그리고 네 번째, 나도 돈을 내지 않고 나머지 입주자들도 돈을 내지 않아 결국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못하는 경우다.
어떤 경우가 가장 바람직할까? 당연히 첫 번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입주자들은 두 번째 경우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무임승차’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모든 입주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데 있다. 그렇게 될 경우, 네 번째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즉, 나를 포함한 모든 입주자들이 돈을 내지 않아 결국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사실은 ‘비겁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관련 영화도 누군가에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그 때도 많은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볼 것이다. 그러나, 1,000만 명, 아니 2,000만 명이 관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말이다. 모두가 ‘암살’ 때처럼 합리적 선택 이론의 두 번째 경우를 선택해 결국 네 번째 상황에 처해질까 걱정이다.
요즘 TV드라마 <어셈블리>가 장안의 화제다. 언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대사가 나오는 걸 보았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한 말이다. 모두가 내 손에는 피 묻히기 싫어한다면, 다시 말해, 조금만 비겁해져서 편안한 인생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결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못할 것이다. Sean1961@naver.com
*필자는 미주 한국일보와 <스포츠투데이>에서 기자, 체육부장 및 연예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스포테인먼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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