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허정도 / 서보형 기자
배우 허정도 / 서보형 기자

[헤럴드POP=성선해 기자] ※ 이 기사에는 영화 '범죄의 여왕'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바뀐다. 왼쪽과 오른쪽이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요, 위에서 내려다보느냐 혹은 아래에서 올려다보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범죄의 여왕'에서 배우 허정도의 다른 얼굴을 만났다.

영화 '범죄의 여왕'(감독 이요섭/제작 광화문시네마)은 아들이 사는 고시원에서 수도요금 120만 원이 나오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가 또 다른 사건을 감지한 '촉' 좋은 아줌마 미경(박지영)의 활약을 그린 스릴러이다. 허정도는 403호에 사는 의뭉스러운 남자 하준 역을 맡았다. 명문대 출신이지만 사법고시 2차에서 10번이나 낙방해, 고시촌의 화석 취급을 받는 장수생이다.

◆ "존재 자체가 스포일러…말 한마디 시원하게 못 했다"

'범죄의 여왕' 속 허정도는 SBS '풍문으로 들었소'나 MBC 'W(더블유)'에서 봤던 모습과는 다르다. 주로 밑에서 그를 비추는 조명과 카메라 덕에 새로운 면이 나온다. 선량한 인상이 아닌, 매우 서늘하고 굴곡이 진 그의 얼굴은 새롭다.

하준은 '범죄의 여왕' 전개의 키를 쥐고 있는 배역이다. 하지만 존재 자체가 스포일러이기 때문에 프로모션 당시에는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고. 그는 "말 한마디 시원하게 못했었다"라며 웃었다.

서늘한 얼굴의 하준은 '범죄의 여왕'의 긴장감을 책임지던 캐릭터다. 촬영 당시 허정도는 인물의 온도를 설정하는데 고심했다. 그는 "10년의 실패와 좌절을 겪었고, 그 아픔으로 열등감까지 갖게 된 인물이기에 쉽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했다"라고 설명했다. 최대한 어두운 톤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 /콘텐츠 판다 제공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 /콘텐츠 판다 제공

"인물이 예민하다 보니 현장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는 이요섭 감독에게 미안해질 지경이더라. 나도 웃으면서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이요섭 감독이 '형이 제일 외롭고 아팠을 것 같다'라며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가 현장에서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매번 하회탈처럼 웃으면서 배우를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더라. 참 부처님 같은 사람이다. (웃음) 결국 촬영 중간에 형 동생을 먹었다."

사실 허정도는 백수장이 연기한 덕구 역을 맡을 뻔했었다. 미경의 정보원 격에 해당하는 배역이다. 이요섭 감독은 허정도에게 맞는 옷이 덕구인지 하준인지 고심하다가, 실제로 그를 보고는 '403호를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덕구가 탐이 났다. 근데 이요섭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하준을 주문했다. 평범하고 착해 보여서 그런 걸 시켜보고 싶다더라. 너무 악역처럼 생기지 않아서 그런가."

◆ "사람이 가장 폭력적일 때는 자신이 작게 느껴지는 순간"

그의 말처럼 평범하고 선한 인물이 한순간 돌변해 살기를 품으면 그 공포감은 배가 된다. 더욱이 하준의 살인 동기가 선천적인 성향이 아닌, 열등감이기 때문에 현실감까지 더해진다. 허정도는 "사람이 가장 폭력적일 때는 자신이 가장 작게 느껴질 때가 아닐까"라며 "스스로가 약할 때 화를 내는 것 같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라고 했다.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 /콘텐츠 판다 제공
영화 '범죄의 여왕' 스틸 /콘텐츠 판다 제공

"우리 주변에는 실제로도 하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진 않을 테지만. 하준은 소속도 없고, 시험을 핑계로 10년 동안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은 적도 없는 사람이다. 하루하루가 흘러가고만 있다. 친구 역시 없겠지. 한 방울만 더해지면 흘러넘치는 상태였을 거다."

스스로가 작게 느껴져 폭력적이게 된 하준. 실제로 그는 PC방에서 미경, 개태(조복래)와의 첫 만남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다. 하지만 미경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자 곧바로 다른 사람으로 돌변한다. 허정도는 이 장면을 가장 좋아하는 컷으로 꼽았다.

허정도는 "주변의 반응을 보면 유독 '범죄의 여왕'이 다른 작품에 비해 선호 장면이 갈리더라. 나 역시 그렇다"라며 미경과 403호 앞에서 벌인 설전, 진숙(이솜)과 복도 앞에서 마주치는 장면 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PC방에서 자다가 일어난 하준의 얼굴이 좋다. 그 순간은 정말 하준 같다. 뭔가 담겨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 "현재를 접어야 하는 젊은이들, 결국은 시스템의 문제"

사실 하준에게는 숨겨진 몇 가지 컷들이 있다. 이혼을 선언한 아내를 살해한 뒤 시체를 처리하는 신과 후반부 개태와의 격투신이 대표적이다.

허정도는 "격투신을 위해 조복래, 김대현(익수)과 액션 훈련을 같이 했었다. 처음에 김대현이 나보다는 잘할 자신이 있었나 보다. 근데 몸을 잘 쓰는 조복래의 입장에서는 둘이 비슷했던 거지. '이 둘은 뭔가' 싶었을 거다. 예비군 훈련 온 아저씨 같달까"라며 크게 웃었다.

결국 허정도와 조복래의 생사를 건 격투신은 편집됐다고. 그는 "고생해서 찍은 게 사라져서 아쉬웠지만 결과를 보니 그게 낫더라"라고 말했다.

이어 "시체 절단신은 하준이란 인물을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요소가 있기에 내부적으로 의견이 갈리더라. 그게 편집이 되면서 영화의 장르가 많이 바뀌었다. 아마 포함됐다면 19세 관람불가 등급을 받지 않았을까"라고 했다.

배우 허정도 / 서보형 기자
배우 허정도 / 서보형 기자

허정도가 기억하는 '범죄의 여왕'은 미덕이 많은 작품이다. 특히나 "돈 많이 버는 사람이 제일 높은 거야"라고 말하는 익수의 대사처럼, 미래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잡힌 청춘들의 기약 없는 현실도 담겼다. 허정도는 "우리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 세상이 그렇게 돼 있더라"라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개인적으로는 하준이란 인물을 만나 재밌었다. 애착이 많이 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자면 (하준처럼) 목표를 위해 현재를 접어야 하는 젊은이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많다. 그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포함한 어른들의 몫인 것 같다. 청년들이 보다 즐거운 걸음을 디딜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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