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의 싸움이 벌어졌다. 단순한 치정극은 아니다. 치열한 두뇌 싸움이자 게임이다. 골탕 먹이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치밀하고, 진심으로 제거할 생각이었다면 버린 기회가 너무 많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의 속고 속이는 이 게임의 끝은 무엇일까.
미스터리 심리극의 거장 안소니 샤퍼의 대표작 '슬루스'(SLEUTH)가 무대에 올랐다. 1980년 발표된 희곡인 '슬루스'는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에서 처음 선보였고, 같은 해 토니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1972년 영화 '발자국', 2007년 영화 '추적'으로 리메이크되면서 대중성까지 확보한 스토리다.
연극 '슬루스'(연출 문삼화·각색 오세혁)는 피아노 선율에 입혀진 앤드류 와이크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타닥타닥 타자 소리와 함께 현재 상황을 묘사하는 그의 대사는 마치 책을 읽듯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대극장 같은' 앤드류의 집에 마일로 틴들이 찾아온다. 서로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지만, 사실 두 사람은 만나서 좋을 것이 없는 사이다. 젊고 가난한 연극배우 마일로는 마가렛과 사귀며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가렛은 영국 최고의 추리 소설가 앤드류의 현재 아내다.
영화와 이번 무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세대' 였던 두 캐릭터가 '같은 세대'로 설정되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앤드류는 백발의 신사지만, 무대 위 앤드류는 젊고 세련됐다. 앤드류와 마일로는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환경, 누리는 문화, 소유한 부의 힘이 다르다. 그래서 그들이 펼치는 게임은 더욱 흥미롭다.
영국의 유명 추리 소설 작가인 앤드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활용해 게임을 시작한다. 그가 펼쳐놓은 판은 마치 추리 소설처럼 흘러간다. 마일로는 체스판의 말이 된 듯 앤드류의 계산대로 움직인다. 첫 번째 게임은 그의 머리 속에서 구상된 이야기가 현실화되는 것 같은 감각적인 게임이다.
배우인 마일로가 생각해낸 게임도 만만치 않다. 두 번째 게임에서 형사로 분한 그는 앤드류의 집을 순식간에 무대로 만든다. 연출의 의도가 어쨌든, 마일로의 엉성한 분장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마일로가 분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형사 캐릭터가 새로 등장한 것인지' 아리송함을 남긴다. 물론 사전 정보 없이 연극을 볼 때의 이야기다. 자신만만하던 천하의 앤드류를 식은땀 나게 만드는 마일로의 연기력은 그가 수염을 떼며 "작은 잔을 들고 있으면 사람이 조금 쩨쩨해 보여서요"라는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반전 쾌감을 선사한다.
두 남자의 대립 구도로 전개되는 '슬루스'의 스토리 자체는 쫀쫀하고 흥미진진하다. 속고 속이는 가운데 녹아있는 트릭은 게임을 보는 재미를 쏠쏠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인물들의 욕망과 내재적 결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연극은 영화에 비해 긴장감은 다소 떨어진다. 영상의 강점이 연출자가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연극 무대는 관객의 시선에서 장면이 결정되기 때문에 연출자와 배우가 의도한 바가 모두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극의 흐름이 살짝 느슨하지만, 이런 부분을 채워주고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배우의 연기다.
앤드류 역의 김종구는 백발에 가까운 금발로 파격 변신하며 우선 비주얼로 눈길을 끌었다. 그의 우월한 피지컬을 더욱 부각시키는 슈트는 부와 권력을 지닌 지식층의 당당한 위세를 자연스레 표현해냈다. 무심한 듯 예의 바른 말투, 타이밍을 알 수 없는 비웃음, 와인을 마시는 독특한 방법 등은 앤드류의 오만한 성격을 고스란히 나타내며 캐릭터에 힘을 실었다. 이런 디테일은 게임을 지휘했던 초반과 게임판 위에서 휘둘리게 된 후반의 온도차를 극대화 시키며 극의 긴장감을 높였다. 김종구의 연기는 마지막에 폭발하는 소유욕과 사랑의 진심에 짓눌려 비틀거리는 몸과 쉰 목소리로 정점을 찍는다.
마일로 역의 정욱진은 주로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하는 배우로 연극 무대에서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무대 밖에서도 다채로운 표정으로 즐거움을 주는 그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특히 절제된 가운데서도 풍부한 감정 표현과 시선 처리가 훌륭했다. 특히 정욱진은 관객의 관심을 끌어올리는 흘리는 연기가 탁월해 집중도를 끌어올렸다. 뮤지컬에서는 다소 과장되게 표현되던 방식들이 대사와 움직으로 축소되면서 정욱진의 연기 진가가 발휘됐다. 머리에 겨눠진 총구에 질끈 눈을 감고, 겁먹은 표정과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정욱진의 모습은 공연인 것을 알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현실감이 느껴진다.
마일로가 뛰쳐나간 뒤 장총을 들고 성큼성큼 그의 뒤를 쫓는 앤드류, 그리고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 소리. 연극 '슬루스'의 엔딩은 결말이 확실한 영화와 다르게 열린 결말이다. 암시로 끝이 나지만 찜찜함은 없다. 총소리가 꼭 누군가의 죽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고, 승-패자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계속해서 다음 게임이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앤드류 와이크 역에는 김종구·정동화, 마일로 틴들 역에는 정문성·정욱진이 캐스팅됐다. 각 캐스팅과 조합마다 세세한 표현법이 다르고, 사용되는 소품도 다르니 보는 즐거움이 두 배가 된다. 연극 '슬루스'는 오는 7월 23일까지 DCF대명문화공장 2관 라이프웨이홀에서 공연된다.
(사진 제공=네오프러덕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