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이 작품은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연극이라고 하기엔 게임적 요소가 너무 많고, 게임이라고 하기엔 메시지가 강렬하다. '신개념'이라고 밖에 포장할 수 없어 아쉬운 이 공연에는 직접 참여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짜릿함과 즐거움이 있다. 지난 22일부터 시작된 신개념 관객참여형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이하 내공어)가 25일 마지막 공연을 앞두고 있다. '내공어'는 공연은 내일인데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스태프들은 이제야 의견을 조율하는 상황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스태프의 의견을 한데 모아야 하는 난감한 현실에 조연출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관객은 조연출을 따라 백스테이지를 누비며 미션을 수행해 공연이 올라갈 수 있도록 돕는다.

한 공연당 120명의 관객만이 참여할 수 있는 '내공어'는 '백스테이지 + 극장 투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그 바탕에 대학로 최고 콤비인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 거기에 황희원 연출까지 합세해 스토리를 입혔다.

'내공어'는 작품에 담긴 뜻을 굳이 파악하지 않더라도 공연을 즐기는 데는 무리가 없다. 조연출 역의 배우들(김슬기·황선화·조한나·손은지)은 노련하게 30명의 관객을 이끌며 분위기를 띄우고, 관객은 그들이 제시하는 게임을 수행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게임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던 '텔레파시 퀴즈' '훌라후프 돌리며 연상 퀴즈' 등 어렵지 않다. 게다가 마지막 무대는 안무 선생님에게 배운 춤을 다 같이 추고, 나중에는 흥겨운 음악에 맞춰 광란의 시간을 보낸다. 다양한 게임과 함께 댄스파티로 정점을 찍은 이 공연은 MT에 온 듯한 기분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이 공연은 '즐거웠던 체험'으로만 남기기에는 아쉽다. 곳곳에 배치된 이야기와 관객이 무대에 선 까닭에는 제작자의 피땀 흘려가며 만든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극장의 사무실, 카페, 분장실, 연습실, 대극장을 돌며 다양한 상황과 마주한다.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이 '성폭력 예방 수칙 프로그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투명한 보드에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을 위한 10가지 수칙이 적혀있고, 직원들은 속마음을 즉석에서 적기도 한다. '내공어'는 각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만나는 '벽'에 대해 이야기한다. 직장내 성희롱은 정말 한 공연을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이야기였다기보다 일상에서 부딪힐 수 있는 '벽'에 대한 에피소드였다. 짧은 드라마를 통해 깊은 공감을 이끌어낸 후 관객에게는 내가 마주했던 '벽'에 대해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하얀 종이가 주어진다. 백지에는 '연봉' '직장상사' '시험' '취업' '텅장' 다양한 키워드가 적힌다. 관객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끼리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서로의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페에서는 작가와 연출의 갈등 상황이 펼쳐진다. 꼭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이 이렇게 작업을 하나?' 싶을 정도로 리얼한 이 드라마는 공연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스토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 에피소드는 '내공어' 진행 상황상, 내일 공연인데 결정된 상황이 없다는 개연성을 주기에 좋은 이야기였다. 이때 관객을 이끌던 조연출은 배역에 이입되어 연출-작가 역의 배우와 함께 연기를 펼친다. 관객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던 반장 포지션에서, 배우로 변신하여 연기하는 조연출의 모습은 현실과 공연의 경계선이 더 모호하게 만들며 관객을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분장실은 '내공어'의 무대 중 가장 좁은 공간이다. 배우들은 관객의 코앞에서 연기를 펼친다. 관객도 관찰자 입장으로 가만히 보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신입 배우가 되어 선배 배우에게 인사도 한다. 이곳의 '벽'은 배우의 "지금 연습이 공연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라는 대사로 드러나는 제작자와의 소통 부재, 배달 음식을 시킨 뒤 발생하는 갈등이다.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벽'을 표현하며 일상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을 첨가해 관객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스트레스가 잘 전달됐던 에피소드다.

극에 점차 흡수되는 관객에게 주어진 마지막 미션은 춤을 배우는 것이다. 외국인 안무가 MJ(주민진)와의 '벽'은 언어였다. MJ 역의 배우는 약 15분간을 영어로만 말을 한다. 완벽한 영어 구사력에 깜짝 놀란 이 상황에는 '차별'이라는 에피소드를 넣어 스토리 자체가 탄탄해졌다. 다만 상황을 무겁지 않게 풀어갔기에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많았다. 관객은 짧은 시간 동안 안무를 배운다. MJ 스토리를 통해 안무를 배우는 이유에도 정당성을 부여했는데 '벽을 넘으면 더 가까워진다'는 말이 그것이다.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이 배우들의 공간인 극장 연습실에서 안무를 배운다는 것만으로도 벽이 흔들렸는데, 곧 배우의 고유 영역인 무대까지 진출하게 된다.

안무 연습이 끝난 후, 조연출은 참석하지 못한 연출을 대신해 3분간 짧게 공연의 역사에 관해 설명한다. 그 중 조연출이 관객에게 10초간 눈을 감고 주위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관객은 한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하며, 똑같은 소리와 공기를 공유한다. 조연출은 '함께 호흡한 시간'을 공연으로 표현하며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어떻게 공연으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공연' 자체에 대한 정의를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극장의 곳곳을 돌아온 120명의 관객은 모두 대극장에 입성한다. 그곳에서는 배우들의 마지막 연기가 시작된다. 작가와 연출은 2층에서 또 투닥거린다. 리허설 현장이 된 무대에는 배우 둘이 관객 사이를 비집고 연기를 펼친다. 어리둥절할 사이도 없이 영상을 통해 우리가 적어낸 벽,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것 등을 영상으로 다시 마주한다. 하늘에서는 공이 쏟아지고, 관객은 그것을 눈앞에 쌓인 벽을 향해 던진다. 벽이 무너지고 앞을 막고 있던 거대한 스크린이 올라가면서 환한 조명이 눈부시게 빛난다. 항상 좌석에 앉아 무대를 올려다보던 관객이 무대 위에서 보지 못했던 광경을 마주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지만, 객석에서 2시간 동안 함께한 조연출들이 손을 흔들며 서 있는 모습은 한층 더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이어지는 댄스 타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뛰고 땀 흘리며 하나가 되고, 헤어짐의 아쉬움과 성취감으로 뒤섞인 감정을 안고 무대 밖으로 향한다.

4개의 팀이 로테이션 되며 각 에피소드를 지나기 때문에 순서는 각각 다르다. 그래서 어떤 팀은 지하 1층에서 출발해 지상 7층에 위치한 연습실까지 극기 훈련을 하게 되기도 한다. 팀 내에서도 4그룹으로 나뉘어서 게임을 하게 되는데, 게임이 팀 대항으로 진행됐다면 더 쫀쫀한 재미가 있지 않을까. 더불어 가장 중요한 마지막 무대에서 4팀이 세로로 무대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가로로 무대를 사용해서 맨 앞줄을 한 팀이 다 차지하게 배치했는데, 아름다운 광경을 한팀이 독식하지 않게 팀별로 나눠서 자리를 배치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지이선 작가는 "'씨어터 RPG' 시리즈는 극장 전체를 하나의 별로 만든다. 관객은 그 별을 여행한다"고 표현했다. 김태형 연출은 '내공어' 첫 공연이 끝난 뒤 "또 하나의 새로운 별이, 우주가 만들어졌다가 소멸됐다"고 말했다. 관객의 적극적 참여가 공연의 분위기를 뜨겁게 만들고, 더 재미있게 만드는 '내공어.' 판을 만들어 준 것은 창작자와 스태프, 그리고 배우들이지만 결국 이 공연의 시작과 끝은 관객 그 자체였다.

25일 공연으로 막을 내리는 씨어터 RPG 1.7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에는 배우 김로사·공재민(분장실), 김수현·김유진(카페), 이안나·윤영민·양소민(기획팀 사무실), 주민진(MJ, 연습실)이 에피소드에 출연하고, 배우 김슬기, 황선화, 조한나, 손은지가 조연출로 분해 120분의 공연시간 동안 관객들과 종횡무진 극장을 누빈다.

(사진 제공=스토리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