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POP=김은정 기자] '킬미나우'가 조명한 현실은 아득하다. 사회적으로 다루기 쉽지 않은 성(性)과 장애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희생과 헌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가족의 현실적 문제를 솔직하게 담아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작품이지만, 단순히 장애나 고통의 안쓰러움에서 비롯된 슬픔은 아니다. 삶과 인생, 그리고 고귀한 생명이 엮어내는 찬란함이 스토리는 물론이고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며 눈물 섞인 감동을 선사한다.
지난 4월 25일부터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 연극 '킬미나우'가 7월 16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킬미나우'는 장애와 안락사 등 다루기 민감한 이슈에 과감히 접근하면서도 개인의 삶과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향해 강렬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2016년 5월 한국 첫 공연에 이어 1년 만에 재연 무대로 돌아왔다.
'킬미나우'는 선천적인 지체 장애로 평생 가족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꿈꾸는 17세 소년 조이와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홀로 아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아버지 제이크의 모습을 그린다. 거동이 불편한 조이는 어느 것 하나 혼자 하기가 힘들다. 화장실 뒤처리는 물론이고 목욕까지 모두 제이크의 손을 빌려야 한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조이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성장기를 겪는다. 모든 사람이 평범하게 겪는 시기지만 조이와 아버지에게는 고민거리가 된다.
조이는 태아 알코올 증후군을 가진 친구 라우디의 조언에 따라 독립을 꿈꾼다. 혼자 살 자신은 크게 없지만 아버지의 삶 또한 존중해주고 싶은 조이는 어렵사리 제이크에게 독립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제이크 몸속에 오랫동안 잠복하고 있던 병이 발생하고 허리에서 시작된 고통이 온몸을 잠식하며 그 또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아버지 제이크, 아들 조이, 제이크의 여동생 트와일라는 분명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다. 수많은 희생과 헌신 위에 유지되고 있던 이 가족은 장애라는 현실 앞에서 때로는 지치고, 힘에 부쳐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파한다. 육체적·정신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이들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의 결단을 통해 고통 앞에 마주한 인간다운 삶과 존엄, 그리고 진정한 이해에 대해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진다.
'킬미나우'는 캐나다의 유명 극작가 브래드 프레이저(Brad Fraser)의 원작이다. 한국에서 이렇게 균열된 삶의 균열된 스토리가 많은 관객의 성원을 받을 수 있던 것은 지이선 작가 각색의 힘이 컸다. 지이선 작가는 '킬미나우' 프레스콜에서 "약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늘 우려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렇게 민감하고 예민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오히려 정면 승부를 택했고, 감정보다 정서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원작에는 없는 오브제인 '오리'를 넣어 상징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야기의 맥락을 더욱 탄탄하게 다졌다. 하얀 종이가 날리는 아름다운 장면인 조이-제이크의 환상 속 이야기와 졸업식 장면도 지이선 작가의 아이디어다.
쉽지 않은 소재인 만큼 높은 연기력을 요구하는 '킬미나우'에는 완벽한 연기를 선사하는 배우들이 함께했다. 촉망받는 작가에서 모든 걸 뒤로한 채 장애를 가진 아들만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 제이크 역은 이석준·이승준이 맡았다. 굳이 연기력을 운운할 필요가 없는 '믿보배' 이석준은 세심한 감정 표현과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극을 이끌었다. 드라마·영화로 얼굴을 비추다 2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이승준은 브라운관을 통하지 않은 살아있는 연기로 생생한 매력을 발산했다.
염색체 이상으로 선천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평생 움직임과 의사소통에 심각한 불편을 겪는 아들 조이는 윤나무·신성민이 연기했다. 최근 연극 무대에서 매체로 활동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윤나무는 설득력 높은 무서운 연기력으로 무대를 압도했다. 재연으로 처음 합류한 신성민은 극이 진행될수록 엄청난 흡입력을 발휘하며 관객을 주목시켰다. 동갑내기 배우인 두 사람은 각각 발랄함과 귀여움이 나타나는 조이를 그려내며 각기 다른 매력을 선사했다. 어떤 설명보다 약 2시간 동안 휠체어를 타고 사지가 불편한 쉽지 않은 연기를 해낸 것만으로 윤나무와 신성민은 큰 박수를 받을 만하다.
12년간 제이크를 만나온 연인 로빈 역에는 이지현·신은정이 함께했다. 특히 신은정은 '킬미나우'가 첫 연극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풍부한 연기 내공으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펼치며 극의 감성을 잘 살렸다. 제이크의 여동생이자 조이의 고모 트와일라 역은 이진희·정운선이 맡아 현실감 넘치는 가족의 모습을 그려냈다. 조이의 친구로 태아 알코올 증후군 증상을 겪는 라우디 역은 문성일·오정택이 담당,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눈길을 끌었다.
극심한 고통에 안락사를 요구하는 제이크의 대사 중에는 "조이가 킬미나우(Kill me now)를 발음하면 '힐미나우(Heal me now)'로 들린다"는 말이 있다. 현실적이라 더 아프고, 희생과 헌신에도 다가오는 불행, 고통을 이기지 못한 죽음, 남은 자가 버텨야 할 무게를 앞에 두고 이 작품이 어째서 힐링극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직접 관객이 되어보라 말하고 싶다. '킬미나우'의 찬란함은 관객의 마음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사진 제공=연극열전)